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경계를 타파한 20세기 미술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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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타파한 20세기 미술 양식

by 작달비100 2024. 9. 27.

20세기 전반기에 사람들의 생활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게 변화했다. 과거에는 일상 업무를 보기 위해 이륜마차를 탔었을 사람들이 세기가 바뀌면서 자동차를 타게 됐다. 전화기나 다른 기술적 발전이 사람들의 의사소통을 수월하게 했다. 과학적 진보가 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 시켰고, 의학의 진보는 고칠 수 없는 질병들로 죽어갈 뻔한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유럽의 총 인구에 엄청난 희생자 수를 기록했으며 수많은 예술가들이 전쟁에 참여하거나 생존하기 위해 그들의 모국을 떠나야 했다. 격변의 시대에 극심해진 삶에 대한 압박도 의심의 여지 없이 사람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세기가 진전됨에 따라 생활의 속도는 점점 가속되고 낡은 가치들은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술가들도 사회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이 같은 변화를 받아들였다. 

 

20세기가 중대한 변화의 시기가 되는 까닭은 많은 미술 운동과 양식들이 새롭게 떠오르고 생겨났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미술 운동들은 종종 단명했다. 20세기 초부터 새 미술 양식은 그 흔적을 새기자마자 곧 사라지거나 아니면 다른 그룹을 생성하거나 했다. 모더니즘은 광범위하게 지속된 용어로서 20세기 초에 형성된 대부분의 미술들을 아우른다. 모든 예술들, 더 구체적으로 말해 1914년 이전의 순수 미술, 응용 미술, 건축, 문학, 그리고 음악까지 해당되는 넓은 분양의 예술들을 가로질러 적용되는 모더니즘은 지난 세기의 오래된 전통 예술을 거부한 대신 현대의 새롭고 진보적인 모든 것들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진은 순수한 미술 매체로 수용되기 시작했다. 세상을 기록하는 이 새로운 방법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 의문을 던지면서 그것에 대해 명백한 이의 제기를 했다. 당신 앞에 있는 어떤 것을 묘사하고자 할 때, 이제는 물감 붓이 아닌 사진기가 훨씬 더 신속하고 쉬운 묘사 수단이 되었다. 화가들은 이런 변화된 미술 개념을 마주하며 사진과 경쟁할 수밖에 없었고, 작업 방향을 재조정해야만 했다. 세잔은 현대 회화의 핵심 인물이자, 20세기 미술 발전에 있어서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로 간주된다. 세잔은 탁자 위의 사과나 풍경을 사실적으로 닮게 그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대상들을 골똘히 관찰하고 검토하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형식적으로 조화를 맞추게 될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자신이 연구해 모은 원칙들을 적용하며 대상의 구조와 명암, 그리고 색의 형식적 차원에서 그림을 실험했다. 그 결과 회화는 물질적 세계에 대한 언급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회화 자체의 고유한 공간감을 지닐 수 있게 됐다. 세잔 이후 회화는 구상이든 추상이든 상관없이, 현실과 구분된 그림의 리얼리티를 전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회화는 그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표현하는 매체로 자리매김한다. 이것은 곧 마티스, 야수파 화가들, 표현주의 작가들, 그리고 20세기에 걸친 모든 미술가들이 이제부터 모방이 아니라 그들의 미술 언어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지 정확히 결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앙리 마티스 <춤> 1909년 / 사진 나무위키

20세기의 위대한 미술가 중 한 명인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는 회화 공간을 순수한 색의 감동을 전달하는 데 사용했다. 그는 관객에게 캔버스 틀 안의 공간이 실재임을 설득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자신의 회화가 색의 광휘와 선, 그리고 구도의 전면적인 조화에서 유의미할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었다. 마티스는 원래 법학을 공부했으나 화가가 되기 위해 그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국립 미술 학교에서 상징주의 운동의 리더였던 귀스타브 모로 클래스에서 그림을 배웠다. 1904년에 마티스는 포비즘 작가들과 힘을 합하여 그룹을 형성했다. 

 

포비즘 시기 이후 마티스의 회화 발전에는 다른 영향들이 작용한다. 거기에는 1906년의 북부 아프리카 여행과 1910년의 뮌헨에서의 이슬람 미술 전시회를 방문한 것이 포함된다. 특히 이슬람 미술전은 그의 차후의 미술 발전에 일조하는데, 가령 동방 직물들의 풍부한 장식 패턴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영향은 그의 1920-1925년 작품들인 <오달리스크> 연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연 예술 기획자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그의 러시아 발레단이 1909년 파리에서 성대한 발레 공연을 했다. 그런데 이것이 마티스의 회화를 위한 또 다른 영감의 원천이 됐다. 그로부터 두 점의 위대한 작품, 즉 춤추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일련의 사람들을 묘사한 <춤>과 <음악>이 나왔다. 이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마티스는 특히 인물 묘사를 연구하는 데 빠져들었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삶에 대한 종교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가장 성공했던 경우는 인물 형상을 통해서였다."

 

1917년 이후부터 마티스는 남프랑스의 코트다쥐르 지방에 있는 도시, 니스에 주로 머물렀다. 이곳에서 그는 주변 경관뿐 아니라 실내에서 발견한 강한 햇빛과 직물들, 장식 패턴을 찬양하는 회화 작품들을 제작했다. 만년에 암이 그를 휠체어에 묶어 놓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미티스는 새로운 작업 방식을 개발해 냈다. 그것은 선명하게 채색된 색지를 단순한 모양대로 자른 다음, 그렇게 나온 '파피에 쿠페(자른 종이)'들을 커다란 추상적 콜라주로 배열하는 것이었다. 삶의 말년에 이르러 마티스는 니스 근처의 방스에 있는 로라지오 예배당에서 벽화, 스테인드글라스, 심지어 사제들의 미사복을 위한 새로운 디자인까지 제작하는 작업을 했다. 

 

화가들은 회화에 적합하고 고유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또한 그들은 그 무엇이라도 영감의 대상으로 선택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자극적이고 급진적인 20세기 미술이 만들어 낸 것은 단 하나의 트렌드나 전개가 아니었다. 오히려 20세기는 다수의 이질적인 미술 운동들의 역사이고 집단이든 개인이든 자유로운 자율적 태도로 주제에 접근한 미술가들의 역사였다. 여기서 탐색과 혁신은 핵심 개념이다. 몇몇 화가들은 반고흐가 남긴 교훈대로 자신의 개인적 투쟁에 초점을 맞추거나 혹은 가장 내밀한 영역을 탐색하기 해 내면 심리의 깊숙한 곳을 찾기도 했다.

 

한편 카지미르 말레비치나 피에트 몬드리안 같은 화가들은 보다 지적인 접근을 선택했다. 이들은 당대의 정치적 혹은 심리적 이론들을 참조하기도 하고, 바실리 칸디스키처럼 미술이 아닌 다른 예술 형태인 글쓰기나 음악을 회화의 출발점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피카소의 큐비즘 실험이 일구어낸 혁신적 조형법,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 세계 안에 흡수된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 프리다 칼로의 매혹적인 자화상들이 보인 통찰력 등은 그 어떤 범주에도 완전히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20세기 회화는 정확히 분류하기 쉽지 않다. 대단히 주관적이고 폭이 넓으며 종류가 다양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