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1600~1700년 바로크 시대 미술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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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1700년 바로크 시대 미술의 특징

by 작달비100 2024. 8. 31.

연극성과 긴장감

16세기 후반 베네치아의 화가 틴토레토는 비교적 초라한 계급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은 천을 염색하는 일을 했으며 그도 평생 베네치에서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다. 다만 그는 염색업보다 주로 종교화와 초상화를 그리며 살았다. 틴토레토는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그림을 드렸고 경쟁자의 그림 가격보다 더 저렴한 가격을 매기는 등 작품의 의뢰를 확보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활용했다. 틴토레토는 보다 나은 그림 구성을 위해 작은 규모의 모형인 마케트(maquette)를 종종 사용했다. 인공조명 아래 왁스 인형들을 배열하여 그것들이 구성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하곤 했다. 그의 그림은 몸을 비틀고 단축된 모습의 인물들로 붐비는데 매너리즘 양식에 의해 항상 움직임과 극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완숙기의 작품에서는 흥분된 감정을 은밀히 표현함으로써 마치 믿을 수 없는 어떤 일이 금방 발생할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스토리텔링의 뛰어난 재능은 베네치아에 있는 스콜라 디 산 로코를 장식한 그림들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 장식 벽화들은 예수의 일생을 짙은 어둠과 초현실적인 빛으로 묘사하고 있다. 훗날 엘 그레코의 작품에서 틴토레토의 영향을 명백하게 찾아볼 수 있다. 

파올로 베로네세<가나의 혼인 >1563 /사진: 위키미디어

 

파올로 제로네제(Paolo Veronese, c.1528~1588)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인 베로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본적으로 장식 화가였으며 비위를 맞추는 듯한 묘사는 16세기 베네치아 귀족 가문들의 허영심을 만족시켰다. 그는 또한 능숙한 종교 화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그린 종교 장면들은 베네치아의 부유하고 호화스러운 사회를 배경으로 그려져 다소 부조화 대조를 이룬다. 베로네제는 연극적인 서술성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회화 주제를 호화로운 색과 색조로 전달했다. 사물의 외형에 대한 예리한 시각과 보석, 비단 및 광택이 고운 견직물의 화려한 질감을 포착해 내는 능력은 화가로서의 그의 인기를 보장해 주었다. 베로네제의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화면은 틴토레토의 논란 많은 접근법의 회화와 늘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수년 후에 베로네제는 자신이 그린 <최후의 만찬>에 드러난 불경하고 불손한 요소들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종교 재판소로 향하게 된다. 

형태의 왜곡

파르미자니노 <목이 긴 성모> 1534 /사진: 위키미디어

 

매너리즘은 하나의 미술 양으로 가장되고 의식적이며 억지로 꾸민 듯 부자연스러운 스타일을 말한다. 매너리즘은 르네상스 시기가 끝나갈 무렵 회화와 건축, 조각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전적 조화에 대한 반발로서 매너리즘은 애매함에 의지하며 변형된 형태와 애매모호한 공간,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색채를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형식을 추구했다. 전형적인 매너리즘의 화가는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이다. 파르마에서 태어난 파르미자니노는 1523년에 로마로 갔으며 그곳에서 여성미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다듬어 내는 일련의 실험을 시작했다. 그 결과 창안된 길쭉한 인의 변형과 왜곡은 기대와 달리 모든 이들의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그의 작품이 지나치게 인위적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후기작에 속하는 <목이 긴 성모>는 동정녀의 비현실적으로 긴, 그러나 우아하게 가늘어진 창백한 목과 어깨 때문에 상당히 유명해졌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는 크레타섬에서 태어난 그리스 화가이다. 그는 전적으로 독창적인 종교적 환영의 작가로 매너리즘의 가장 위대한 주창자였다. 처음 엘 그레코는 그리스에서 비잔틴 전통의 종교적 성상들을 그렸지만 1560년에 베네치아로 이주한 이후 그의 회화는 달라졌다. 거친 윤곽선과 극적인 빛 그림자로 그려진 그의 작품들은 틴토레토의 영향을 분명히 드러냈다. 1577년에 엘 그레코는 스페인의 톨레도로 옮겨가 그곳에서 죽는 날까지 살았다. 여기서 그의 회화 양식은 성숙기를 맞으며 역동적이고 길쭉한 인물상, 아치 불길처럼 불안정하게 명멸하며 불가사의하게 보이는 인물상들이 발전되었다. 모든 움직임은 화면의 꼭대기를 향해 쓸려 올라가고 빛과 빠른 붓놀림, 그리고 용해되는 색들은 이미 작열하는 듯한 화면에 시적 강렬함을 더한다. 이러한 왜곡 효과를 성취하기 위해 아마도 거울이나 다른 광학적 보조 수단을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극적인 빛과 그늘

17세기가 시작될 즈음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의 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했고 피렌체나 베네치아는 점차 그 중요성이 기울었다. 반종교 개혁 운동이 이탈리아의 가톨릭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이 가톨릭 부흥 운동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로마에서 가장 명백하게 진행됐다. 바로 이 도시로 화가인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Caravaggio, 1571~1610)가 1592년에 이주해 왔다. 이즈음 카라바조는 작품 의뢰가 거의 없는 무명 화가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1596년에 콘타렐리 예배당의 프레스코화를 그리기로 계약하면서 바뀌었다. 그가 완성한 <성 마태> 연작은 대중의 이목을 끄는 한편 성직자들에게는 '천박하고 신성 모독적'이란 비난을 받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카라바조는 거칠고 불안정한 성격의 소유자로 때로 폭력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의 그런 기질 때문 아니라 논란을 불러일으킨 혁신적인 표현 방식 때문이다. 

 

이상미를 추구했던 르네상스 미술을 거부한 카라바조는 자연을 연구하고 평범한 일상의 남자와 여자를 모델로 삼기 원한다고 공언했다. 모델을 보면서 바로 유화를 그려 내는 그의 제작 방식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또 다른 획기적인 혁신은 그가 사용한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의 명암법이었데 이것은 빛과 그늘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는 방법이었다. 그의 놀라운 기술은 인물의 극적인 제스처 및 현세적 사실주의와 함께 관객의 눈길을 끌었으며 특히 이전의 매너리스트 양식이 얼마나 가식적이었는지를 잘 보여 주었다. 카라바조는 영향력 있는 후원자들의 보호를 받곤 했으나 그가 구사한 자연주의적 표현 기술은 간혹 톨릭 성직자들을 분노케 하고 감정을 상하게도 했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카라바조 작품의 극적인 효과가 당시 교회를 반격하던 프로테스탄트들의 공격의 빌미가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성공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싸움 끝에 동료를 살해했으며 이 때문에 로마를 등지고 도주해야만 했다. 이후 말라리아에 걸린 그는 37살의 이른 나이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