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사과에 집착한 화가 '폴 세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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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에 집착한 화가 '폴 세잔'

by 작달비100 2024. 9. 25.

폴 세잔(1839-1906)은 프랑스의 대표 화가로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의 삶은 근대와 현대라는 두 중요한 변화의 시기에 걸쳐 있다. 그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로 두 시대의 경계에서 단절과 혁신이라는 분열을 드러낸다. 그는 19세기 후기 인상주의의 마지막을 장식한 의미심장한 화가인 동시에 20세기 초에 단 6년을 살다 갔음에도 현대 미술에 엄청난 충격과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다. 세잔의 회화 형태와 구조에 획기적인 실험은 결국 그를 레오나르도나 렘브란트만큼 중요한 미술가로 간주하게끔 했다. 

 

폴 세잔 <자화상> / 사진 위키미디어

 

세잔은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서부에 있는 체사나라는 마을에 살았다. 비교적 부유한 가문에서 자랐으며 아버지께 받은 비용으로 엑상프로방스의 고향을 떠나 파리로 유학 갈 수 있었다. 파리에서 세잔은 인상파 화가였던 카미유 피사로를 만난다. 처음 1860년대 중반 세잔과 피사로의 친분은 스승과 제자 관계였는데 피사로는 세잔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세잔의 초기 작품은 풍경화가 많았는데 후에는 직관적인 관찰과 빛을 이용한 화풍을 띠게 되었다. 그는 한평생 동안 그가 실제 눈에 보이는 것에 가장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화법을 찾아 가장 현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세잔의 초기작들 대부분은 상당히 어둡고 종종 팔레트 나이프로 물감을 두껍게 발라 무거운 느낌을 준다. 그러다가 1870년대에 인상주의자들과 접촉하면서부터 그의 그림에 전에 없던 자유로움과 경쾌함이 나타난다. 1886년 부친의 별세로 인해 세잔은 엑상프로방스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그는 조형의 견고함과 형태의 문제에 몰입하며 치열한 작업 시기를 시작했다. 

 

세잔은 자연을 단순화시킬 때 기하학적 모양으로 변하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몇 가지 주제에 집중했는데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를 비롯해 목욕하는 사람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 같은 소재라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아주 강력하고 흥미진진한 대상이 돼. 그러니 앞으로 몇달간은 같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관찰할 거야. 오른쪽에서 보면 전에 못 본 게 나와 왼쪽으로 보면 또 전에 놓친 게 나오곤 해"

-폴 세잔, 1906년 9월 8알 아들에게 쓴 편지 중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 사진 위키미디어

 

세잔이 사과와 연을 맺은 것은 1852년 친구 에밀 졸라와 만나면서부터다. 가난하고 병약한 소년이었던 졸라를 친구들은 괴롭혔고 세잔은 그런 졸라를 구해줬다. 졸라는 세잔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사과를 건넸고 세잔은 선물 받은 사과를 그려서 졸라에게 보여줬고, 그는 세잔의 그림을 칭찬해 줬다. 이후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고 30여년간 편지를 교환하며 예술을 논했다. 폴 세잔의 말년 대표작 <사과와 오렌지>를 보면 무질서한 배치와 구도 같지만 색다른 안정감을 주는 사과들을 표현했다. 다양한 그릇에 담긴 사과, 접 테이블보에 올려진 사과, 쌓아놓거나 흩어놓은 사과, 아슬아슬하게 테이블에 걸쳐있는 사과. 세잔은 집착이라고 할 만큼 사과를 관찰하고 그리기를 반복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사과만 쳐다봤고, 사과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과정을 화폭에 담았다. 이 작품은 완성하는데 무려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어떤 것은 위에서 사과를 본 것 같고 어떤 것은 옆에서 보는 것 같다. 전통적인 원근법에서 벗어나 다각도에 사물이 가진 짜 형태와 색채, 구조를 바로 보려 했으며 다채로움을 화폭 안에 동시에 구현하여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했다. 

 

친하게 지내던 인상주의 화가들 그의 그림을 보며 '미친 화가'라고 혹평했고 친구인 졸라마저 세잔의 그림을 비난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카미유 모클레르는 '세잔은 앞으로 15년간 미술사에서 가장 기억되는 웃음거리로 남을 거야'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온 세잔은 비록 마음은 상처투성이였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오렌지를 그리든, 프로방스의 언덕을 그리든 혹은 누드모델을 두고 작업하던 그의 관심은 오직 자신 앞에 보이는 대상의 근본적 구조를 지각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일에 있었다. 또한 그는 색조가 형태에 미치는 영향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색조에 대한 연구도 거듭했다. 결국 이는 그의 대다수 그림이 화면에 대한 기본적인 재검토였음을 의미한다. 그림의 틀 내에서 공간감을 재창조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입증해 보인 세잔은 회화 실험의 연장인 큐비즘(입체파)을 예시했고 나아가 20세기 현대 회화를 위한 길도 터놓았다. 

 

세잔은 밭에서 그림을 그리던 어느 날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2시간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돌아가는 도중 쓰러졌다. 지나가던 마차에 발견돼 집으로 돌아왔으나 이튿날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러 나갔다가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그와 함께 일하던 모델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왔으나 세잔은 일어나지 못했다. 1906년 10월 22일 폐렴으로 그는 숨을 거뒀다. 

 

1907년 9월, 파리에서 세잔의 작품들을 모아 큰 박물관 같은 회고전이 열렸다. 이 회고전은 파리에 있는 아방가드르릐 방향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위치를 19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로 격상시켰다. 세잔의 기하학적인 명료화와 광학 현상에 대한 탐구는 피카소, 브라크, 글레이즈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같은 물체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며 형상을 재구성하는 실험을 지속했으며 세잔은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미술 영역에 큰 영감을 주어 현대 미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