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진정한 영웅을 기다렸던 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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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영웅을 기다렸던 화가들

by 작달비100 2024. 10. 2.

프랑스 제1공화국이 군이자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코르시카섬의 하급 귀족 가문 출신의 군인으로 프랑스 혁명 시기에 벌어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며 국민 영웅이 되었고, 종신통령을 거쳐 황제에 즉위했다. 사람들은 젊은 나폴레옹을 프랑스 대혁명의 여세를 몰아 세상에 자유를 가져올 영웅이라고 믿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것은 그가 세운 공로라기보다 "스스로를 구세주로 부각할 줄 아는 뛰어난 정치 수완을 발휘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나폴레옹은 누구보다 미술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었는데 예술의 영원성이라는 가치가 그를 위대하고 불면의 존재로 만들어 줄 것을 알았다. 미술을 비롯한 예술이 선전의 도구로, 우상화의 수단으로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을 간파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원정에 여러 직업 화가 대동해서 전쟁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자신의 치적을 담은 그림을 그리게 해 자신의 선전 도구로 활용했다. 이 시기 앙투안장 그로, 자크루이 다비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등 다양한 화가들이 그의 초상화를 남겼다. 

앙투안장 그로 (Antoine-jean Gros, 1771-1835)

앙투안 장그로, <아일리우 전투의 나폴레옹> 1807 /사진 위키미디어

 

그로는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인 동시에 낭만주의의 선구자이다. 초상화가로 특히 전쟁화에 독보적인 명성을 나타냈다. 그는 파리 태생으로 아버지도 화가였고 14세에 자크루이 다비드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몸을 피해 1793년에 혼자 이탈리아로 떠나며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격정적인 작품에 심취했다. 그의 대표작에는 1804년 작 <야파의 페스트 환자를 위문하는 나폴레옹>은 위문하는 나폴레옹이 환자와 만나는 순간을 그렸다. 나폴레옹이 부하 장교들과 함께 성 니콜라스 수도원을 찾은 모습을 그렸다. 장교들은 페스트를 앓고 있는 병사에게서 나는 악취 때문에 손건으로 코를 막고 있지만 나폴레옹은 대담하게 병사의 몸을 만지며 위로한다. 실제는 치욕스러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한 계획된 작품이다. <아일리우 전투의 나폴레옹, 1807>은 고통과 죽음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했고 1808년 살롱전에 출품해 경쟁자 25명을 제치고 대상에 선정됐다. 웅대한 전장 분위기를 담아낸 대서사시로 평가받은 작품이다. 나폴레옹은 아일라우 전쟁에서 입었던 망토와 모자를 그로에게 하사했는데 그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그림을 통해서 전쟁의 비극과 나폴레옹의 야심을 깨닫게 된다. 1816년, 실각한 스승 다비드는 벨기에로 떠나면서 장 그로에게 뒤처리를 부탁했다. 급변하는 시대에도 불구하고 그로는 스승 다비드의 화실을 계속 지켰다. 그로는 자유분방한 정신을 가고 있었으나 스승의 엄격한 비판과 작품에 대한 불만과 주위의 모순으로 갈등하다 센강에 몸을 던진다.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의 맹세> /사진 위키미디어

 

신고전주의 양식에 속하는 유력한 프랑스 화가로 이 시대의 탁월한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다비드는 프랑스혁명 그리고 나폴레옹 떼려야 뗄 수 없는 화가이다. 다비드는 랑스혁명 초기에는 혁명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려 명성을 얻었다. 파리에서 태어나 그는 일찍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한 다비드는 금세 두각을 드러냈다. 매년 열리는 최고 권위의 학생대회인 '로마상'에 다섯 번을 도전한 끝에 최고상을 받는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이듬해 로마에서 유학하며 고대 미술에 큰 감명을 받는다. 인류 역사를 움직이는 위대한 인물들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된다. 5년 후 파리로 돌아온 다비드는 미술계를 휩쓸기 사작한다. 그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찬사가 쏟아졌고, 루이 16세의 의뢰를 받아 발표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최고의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던 중 프랑스 혁명이 터졌고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 다비드는 자신이 찾던 빛나는 '영웅'을 발견한다. 급진적인 혁명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였다. 다비드는 핵심 정치인이자 미술계의 황제로 떠올랐으나 영웅이라고 생각했던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꿈꾸던 영웅이 아니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의 대관식> 1805-1807 / 사진 위키미디어

 

1979년, 누군가 다비드를 찾아오는데 파리 정계를 뒤흔든 떠오르는 장군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은 다비드에게 자신의 원정에 동행을 요청했으나 다비는 거절한다. 몇 해 후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사실상 최고의 권력자가 되자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자신이 찾던 '진정한 영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폴레옹의 위대함을 선전하는 대표 화가가 된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그 심한 혼란을 겪었는데 내전에 지친 프랑스 사람들은 '누가 좀 세상을 안정시켜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고 나폴레옹은 그런 사람들의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켰다. 1807년 다비드가 완성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은 진심으로 나폴레옹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온 작품이다. 물론 정치적 선전의 의도가 있었지만, 이 작품은 나폴레옹의 위엄을 잘 들어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완벽한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은 점점 자신의 야망을 들어내며 변해갔고 결국 1815년 처절하게 몰락하고 만다. 1816년 다비드는 68세의 나이로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을 떠난다. 다비드는 나이 든 망명객 신세였지만 당대 유럽 미술계의 최고 거장이었다. 궁정화가, 예술부 장관 등 많은 이들이 그에게 다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다비드는 모두 거절했다. 한때 이혼했던 아내와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며 제자 양성에 매진했고 7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