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자유로운 손놀림과 순간의 포착_인상주의 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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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손놀림과 순간의 포착_인상주의 화가들

by 작달비100 2024. 9. 19.

인상주의의 공식적 출발점은 1874년으로 기록된다. 이 해에 모네, 르누아르, 파사로, 시슬레, 세잔, 모리조, 드가는 파리의 어느 사진가의 스튜디오에서 전시회를 조직했다. 이곳을 우연히 방문했던 한 저널리스트가 그룹의 명칭을 지었는데 그는 모네의 회화인 <인상, 일출>에 대해 "준비 상태의 벽지조차도 이보다는 더 완벽할 것"이란 맹렬한 비난을 쏟아 낸 다음 '인상파'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빛의 유희_클로드 모네(1840-1926)

클로드 모네 <봄> /사진 위키미디어

 

전형적인 인상주의자다. 그는 백색으로 도배된 캔버스 바탕 위에 곧바로 순백의 물감들을 칠해 나갔으며 이는 곧 그의 작품을 규정짓는 특징이 됐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던 모네는 자연풍경을 가로지르는 빛의 유희를 포착하기 위해 빛을 발하는 밝은색을 주로 사용했다. 그리고 불필요한 세부들을 제거하고 대시 끊임없이 변화하는 광경을 기록하기 위해 신속한 스케치식의 붓놀림을 사용했다. 모네는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성장하며 교육을 받은 도시는 르아브르였다. 이곳에서 만난 풍경화가 부댕은 모네가 자연을 직접 사생하면서 그림을 그리도록 격려해 주었다. 이후 모네는 파리로 가 개인 아틀리에에서 회화 공부를 하면서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바지유를 만난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퐁텐블로 근교의 샤이로 가서 야외 풍경화를 그리곤 했다. 이렇게 해서 인상주의 그룹의 배아가 발생했다. 1860년대 동안 르누아르와 모네는 최초의 순수한 인상주의 회화를 제작해 냈으며, 이들의 화면에는 얼룩덜룩한 그림자와 함께 눈부시게 반짝이는 빛 효과를 위해 색 물감을 짧은 붓 터치로 찍어 낸 화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네는 8차례의 인상주의 전람회 중 5차례에 걸쳐 참여했다. 그의 작품들은 계속해서 호의적이지 못한 평을 받았고 다른 인상파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가난을 경험해야 했다. 그런데 화상 폴 뒤랑-뤼엘이 시의적절하게 개입하면서 상황은 개선되기 시작했다. 뒤랑-뤼엘의 거래로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은 더 안목 있고 분별력 있는 관객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덕에 모네는 재정적 문제에서 벗어나 오로지 빛에 대한 연구에만 전념하면서 빛이 자연 대상에 부딪힐 때 형태가 변형되는 것을 계속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1876년에 그는 개별 모티브에 기초한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생 라자르 역>연작, <건초 더미>연작, <루앙 대성당> 연작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에 속하다. 이들 연작이 보여 준 예리한 색조 감각들에 대해 세잔이 찬탄하며 "모네는 하나의 눈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세상에 이 얼마나 놀라운 눈인가"라고 한 말은 꽤 잘 알려져 있다. 1883년에 지베르니에 정착 다음, 모네는 대규모의 연못 정원을 만들었다. 하지만 점차 시력을 잃어 가던 만년의 모네는 이곳에서 정착해 수련들로 가득 찬 대단히 큰 캔버스 작품들을 완성해 나갔다. 이들 대형 수련 연작은 관객을 완전히 에워싸서 연못 안에 있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게 하며 순수한 색채 분할의 화면들은 몇십 년 후에 도래할 추상 표현주의를 예고하기에 충분하다. 

자유분방한 회화방식의 에두아르 마네(1832-1883)

에두아르 마네 <풀밭위의 식사>, 1863/ 사진 위키미디어

 

마네는 파리의 안정된 중층 가정 출신이다. 부르주아였던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가가 되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 공부에 주력했다. 이 시기 루브르에서 본 스페인의 거장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회화는 젊은 마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귀스타브 쿠르베의 사실주의 회화도 중요한 참조가 됐다. 마네는 자신에게 친숙한 중산층 사회를 내용으로 취해 그림 그렸던 화가지만 그가 드러낸 강한 색조 대비와 대담한 채색, 그리고 비정통적인 구도는 기성 회화에 대한 반항으로 항상 비추어졌다. 마네의 걸작 <풀밭 위의 식사>에는 한 명의 벌거벗은 여자가 정장을 한 남자들과 함께 야외에서 피크닉을 하는 광경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살롱전 심사에서 낙선됐을 뿐 아니라 심지어 충격적이라고 간주하였다. 이유는 단지 그림 속 여인의 노출성 때문만이 아니라 여성 나체가 고전적인 배경 안에 우아하게 설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네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고전적 작품을 재해석한 <올랭피아>라는 또 다른 그림을 연달아 출품함으로써 다시금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떠들썩한 논란은 <올랭피아>가 성적 취향을 공공연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여성 모델의 시선이 도발적이라 점 때문에 불거진 것이었다. 

 

1870년대에 아르장퇴유에서 그림을 그리던 마네는 이즈음 이상파 화가들과 더 많이 만났다. 그러면서도 작업실 안에서 모델을 두고 그리는 일도 계속했다. 여하튼 그는 풍경보다는 가수나 바의 여급 같은 인물들 혹은 이들과 이들이 거주하는 도시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늘 흥미를 가졌다. 마네의 정물화들은 그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에 속한다. 일상 사물들을 예리하게 관찰해 낸 그의 정물화는 활기찬 붓놀림과 환하게 빛나는 색 효과로 촉각적 물질감을 자아낸다. 

삶의 기쁨을 순간포착  한 화가들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는 삶의 기쁨을 표현한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삶의 기쁨을 귀여운 아이들, 유쾌한 사람들, 사회 유명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모델이 된 어여쁜 여인들 사이에서 발견했다. 르누아르는 리모주의 비교적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845년 파리로 이주해 중등학교 교육을 받았고 졸업 후에는 돈을 벌기 위해 초상화 그리는 일을 했다. 그가 모네를 난 해는 1862년이며 그와 더불어 8차례의 인상주의 전시회 중 4차례 전람회에 참가했다. 1867년과 1870년 사이 기간에 모네와 르누아르는 야외에서 나란히 함께 작업했다. 그들은 양귀비꽃이 핀 들판과 센강변의 풍경을 그렸으며 둘 다 열정적으로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르누아르는 밝게 반짝이는 색들을 사용하되 검은색을 전혀 섞지 않는 획기적인 색조 선택을 했다. 그의 회화에서 가장 어두운 색깔은 거무스레한 암갈색과 군청색을 혼합한 색조였으며 솜털같이 가벼운 붓놀림은 특별히 부드럽고 유연한 형태감 만들어 내는 데 기여했다. 

 

르누아르보다 훨씬 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에드가 드가(1834-1917)는 파리의 명문 고등학교와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했으며 르네상스 작품들을 공부하기 위해 나폴리와 로마에 체류했다. 그는 처음에 엄격한 고전적 방식으로 초상화들을 그렸지만 동시대 생활에서 추출된 장면들을 그리기 위해 초상화를 포기했다. 그리고 발레, 연극, 서커스 및 경마장 같은 당대 도시인들이 즐기던 일상적 삶의 광경 등을 그리기 시작했다. 드가는 인상주의의 배경 이론에 완전히 동의하거나 지지하지 않았다. 그렇긴 해도 그는 1861년부터 확장된 인상파 모임의 구성원이었으며 1886년까지 그들과 함께 전시 활동을 했다. 드가는 개인적으로 새로 등장한 사진기의 표현에도 몰입하고 있었다. 사진과 일본 판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곧 회화에도 영향을 미쳐 특이한 각도의 화면 구성이나 경계선에 의한 인물 신체의 절단, 탈 중심의 초점 사용 등을 시도했다. 결국 드가의 회화는 매우 극적인 화면 구도를 특징처럼 드러냈으며 대다수 작품은 유화나 파스텔로 신속하게 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