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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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by 작달비100 2024. 9. 13.

1860년대 파리에 일군의 미술가들이 작품을 위한 테마와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느슨한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이 새로운 그룹은 뚜렷한 체계나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멤버들은 전반적으로 19세기 프랑스 미술계를 지배하고 있던 아카데믹한 화풍에 저항하고 있었다. 당시 미술 아카데미는 전통적 가치를 치켜세우며 미술가들에게 역사적인 주제나 종교적 테마 초상화만이 가치가 있다고 하 반면, 풍경화나 정물화는 그렇지 못하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분더러 매끄럽고 완성도가 높으며 자연주의식 묘사를 한 작품들을 훨씬 더 선호하고 있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위의 식사>,1863 /사진 위키미디어

 

1863년의 '낙선전'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 전시회는 공식적인 미술 아카데미와 그 부속 전시인 파리 살롱전이 마네와 세잔 휘슬러를 위시한 상당수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지 않기로 결정한 데 대한 반발로 열린 비공식 전시회였다. 제도권과 미술 평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지 않기로 결정한 데 대한 반발로 열린 비공식 전시회였다. 제도권과 미술 평론가들의 경멸과 무시에도 불구하고 이 낙선자들의 전시회는 기록적인 관객들을 끌었고 결과적으로 공식 살롱전에서 거부된 작가들로 구성된 전시도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874년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 세잔, 모리조, 드가 등으로 이뤄진 작가 그룹이 어느 사진가의 스튜디오를 빌려 그들만의 전시회를 조직했다. 이 전시가 바로 최초의 인상주의 전시회이다. '인상파'라는 명칭은 루이 르로아라는 저널리스트가 만든 용어로, 처음에는 단순히 결명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한 풍자 잡지에서 르로아는 모네의 그림에 대해 "자연에 대한 인상, 그 이상이 아니다"라며 조롱했다.

 

인상주의 그룹은 다양한 작가들로 구성됐다. 최초의 모임은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로 이뤄졌는데 이들이 곧 피사로, 세잔, 모리조와 친분을 쌓으면서 후자들을 그룹에 끌어들였다. 그리고 마네의 친구였던 드가도 이들에게 합류했다. 인상주의 작가들은 당시 미술계의 두 축인 고전주의적 사실주의와 대단히 주관적이며 감정적인 낭만주의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화파의 작가들은 무엇보다도 야외로 나가서 원래부터 있는 세상 그대로를 그리길 원했다. 그들은 자연의 생생함과 자발성을 매 순간의 일시적 효과로 포착하여 그림 위에 옮겨놓고자 했다. 이 같은 이상주의 작가들의 바랍은 그림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자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회화의 표면 효과, 예컨대 그림의 질감과 물감의 물성, 그리고 칠해진 방식에 몰두했다. 인상주의 회화는 전형적으로 짧고 굵은 붓 터치를 배열하며 색들을 캔버스 위에서 섞이지 않고 서로 나란히 놓이도록 했다. 완전히 검은색은 피하고 젖은 물감들을 포개어 놓아 색의 모서리가 좀 더 부드러워 보이도록 하는 한편 건조되기 전까지 색의 점진적인 용해를 도모했다. 인상주의자들은 자연에서 직접 그림을 그렸던 코로와 부댕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외에 인상주의를 위해 길을 닦은 다른 선행 화가들로는 들라크루아, 루벤스 및 터너를 손꼽을 수 있다. 

 

인상주의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중요한 미술은 일본의 대중적인 목판화인 우키요에이다. 이들 일본 판화 서구의 전통적 구도와는 전혀 다른 비관례적 구도로 눈길을 끓었다. 특히 에드가 드가가 우키요에 판화의 열렬한 수집가였다. 드가는 또한 예리한 사진가이기도 했는데 인상주의자들은 사진기의 개발로 열린 새로운 시선의 가능성을 회화에 옮겨 실험하고 했다. 프랑스 대중들이 인상주의를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인상주의자 개개인이 인상주의 그룹전들을 통해 얻은 금전적 대가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은 점차 인정받게 됐는데 그 계기는 화상인 폴 뒤랑-뤼엘이 그들의 작품을 선택하고 그들을 위해 런던과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면서 찾아왔다. 인상주의는 의외로 미국에서 환영받았다. 미국 작가들인 휘슬러, 이이킨스, 호머는 유럽에 유학했던 화가들로서 인상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나폴레옹 3세가 1851년 프랑스의 두 번째 제정을 열면서 황제가 되었다. 그는 이해부터 파리를 유럽의 새로운 중심지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고 건축가인 오스만 남작을 고용하여 수도의 중심지를 재정비하게 했다. 오스만 남작이 세운 새로운 도시 계획의 특징은 가로수들이 늘어선 넓은 대로에 있었다. 이 대로들을 중심으로 도심 곳곳에 새로운 광장과 공원, 공공건물들이 건립되어 미술가와 문필가들 사이에 우아하고 멋진 카페 소사이어티를 형성하게 했다. 이 같은 환경 안에서 시인인 샤를 보들레르와 소설가인 에밀 졸라가 교유했으며, 동시대 화가들인 인상주의자들도 카페 게르부아에서 서로 교류하며 활동할 수 있었다. 

 

후기 인상주의는 1886년과 1910년 사이 기간에 인상파 화가들을 따랐던 또 다른 일단의 작가 그룹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후기 인상주의자들도 인상주의자들처럼 느슨하게 뭉친 그룹이며 애초의 인상주의자들처럼 느슨하게 뭉친 그룹이며 애초의 인상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다양한 성분을 보여준다. 그들의 작품은 새로운 주관성을 드러내며 주요 작가들로는 세잔, 반고흐, 고갱, 쇠라, 툴루즈-로트레크, 뷔야르, 보나르, 클림트, 뭉크 같은 대단히 상이한 경향의 화가들이 거론된다. 그중에서도 세잔은 후기 인상주의의 핵심적인 화가로, 20세기 미술의 중요한 선구자로 간주한. 그는 사물의 근본적 구조를 모색하는 일에 열중했으며 그의 작품은 실재와 추상의 원칙들 사이의 투쟁을 가리킨다. 결국 그의 회화적 실험은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여는 기초를 놓았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