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이탈리아 르네상스_초기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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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르네상스_초기 르네상스

by 작달비100 2024. 7. 29.

서구 문명이 그토록 환호했던 르네상스 시대가 예술의 역사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도 얼마나 중요한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지 않고서는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사 또한 접근하기 어렵다. 사실상 그것은 기존의 세계상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민중의 정신적 · 종교적 · 사회적 · 도덕적 행위에 있어서도 최소한 두 세기에 걸쳐 시도되고 완수된, 완전히 근본적인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강인한 불굴의 의지에 불타는 개인들은 낡은 조직들에 주체적으로 맞서게 되었고 그 결과 자유와 해방 정신으로 중세 쇠진한 교리들을 대신해 새롭고 풍요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모든 분야에서 인간은 열정적이면서도 집요하게 자신의 힘과 가능성, 또 특권을 자각하고서 그 허물을 벗고 자신을 드러냈다. 

세이나 대성당(사진출처: 위키미디어)

 

구텐베르크는 1400년에 태어났다. 콜럼버스는 1451년, 에라스무스는 1465년,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루터는 1483년, 로욜라는 1491년, 라블레는 1494년, 칼뱅은 1509년, 베잘은 1514년, 앙브루아즈 파레는 1517년, 롤랑 드 라쉬스는 1520년, 쿠자스는 1522년, 롱사르와 팔레스트리나는 1524년, 몽테뉴는 1533년, 갈릴레이는 1564년, 몬테베르디는 1568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기의 황혼기에 살아갈 날들이래야 고작 열여섯 해밖에 남지 않은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가 각각 《돈 키호테》와 《햄릿》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 200년 동안 대규모 사건들이 세계를 뒤흔들었다. 백년전쟁은 봉건에서 종지부를 찍게 했고, 프랑스는 다시 일어나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곧이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대륙들을 분점할 기세였다. 콘스탄티노플은 터키 영토가 되며 라틴의 구제국은 몰락한다. 두 차례에 걸친 장미전쟁이 영국을 갈라놓는가 하면, 유럽은 거듭된 종교전쟁으로 갈기갈기 찢긴다. 결국 크레시 전투에서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가 "인마(人馬)를 질겁하게 만드는 작은 쇳덩어리들이 퍼부어졌다."라고 했던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완성되던 '구포(舊砲)'는 16세기 말에 가서 현대전의 지배적 '대포'가 된다. 

 

인종과 민족, 국가와 사회 및 신념 등의 불화가 그토록 빈번하고 잔인하며 처절한 이 새로운 세계의 뒤끓는 갈등과 반목 속에서 이와는 반대로 예술의 경이로운 정복들은 결코 꺼지지 않는 지속성과 신념으로 화해의 평화적 성격과 용서의 마술적 덕목을 부각시킨다. 아쟁쿠르 전투가 있던 해에도 도나텔로는 <세례 요한>을 완성하고 랭르 형제는 세밀화 <풍요의 계절>을 그린다. 잔 다르크가 루앙에서 화형당하던 해에 프라 안젤리코는 피렌체에서 <동정녀 대관식>을 그리고 반 에이크는 브뤼헤에서 제단화 <신비로운 어린 양>에 몰두한다. 무모(無謀) 왕 샤를이 낭시 부근에서 살해던 때 보티첼리는 <봄>을 완성한다. 사보나롤라가 고문당하던 해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알브레히트 뒤러는 <요한묵시록>을 목판에 새기며 물랭이 대가는 <영광의 동정녀>를 채색한다. 마리냐노 전투가 벌어지던 해에 미켈란젤로는 <모세>를 조각하며 라파엘로는 <부르크 화재>를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는 이젠하임 제단화를 그린다. 한편 독일의 황제 카를 5세가 종교재판소를 설치하는 바로 그 해에 코레조는 파르마의 둥근 천장을 장식하고 홀바인은 <마이어 시장의 동정녀>를 그린다. 보두아 학살이 벌어지던 해 티치아 노는 <음악을 듣고 있는 베누스>를 그리며, 첼리니는 <페르세우스>를 제작한다. 기즈 공이 암살당하던 해에 제르맹 필롱은 <세 여신>을 완성시키고, 브뤼겔은 <무고한 아기들의 학살>을 그린다. 나우팍테 전투가 벌어지는 해에 팔라디오는 비첸차에서 로지아 델 카피타노를 짓고, 틴토레토는 베네치아에서 산 로코 스쿠올라의 장식화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있던 해에 베로네세는 <시몬 집에서의 식사>를 그리며, 장 드 불로뉴는 <비상 하는 메르쿠리우스>를 제작한다. 무적의 스페인 아르마는 해군이 패하던 해에는 카라치 형제가 파르네세 궁의 장식화에 착수하고 엘 그레코는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에 매달린다. 그리고 조르다노 브루노가 로마에서 형당하던 해에 청년 루벤스는 약관 스물셋의 나이로 바로 그 새로운 세기의 여명에 이탈리아로 떠나, 곤차가 궁정에서 오늘날에는 안타깝게도 유실되어 버린 '만토바의 가장 뛰어난 미녀들'의 초상을 그리게 될 것이다. 

 

유럽에서 예술은 즉시 전폭적인 기세로 르네상스에 몰두하지 않는다. 가령 15세기 초에 이미 이탈리아가 르네상스의 고대 요람들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면, 다른 지역에서는 정복과 유행과 전염에 의해서만 침투할 뿐이다. 즉 그 유행은 대단히 신속하게 번져 나갔고, 바라 마지않던 것이기도 했지만 불가분 정복과 설득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혹은 꽤 지독하며 심각한 감염과도 같았다. 프랑스에서 르네상스는 거의 눈에 반해 버린 사랑의 표시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렇지만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는 느리고 더디며 종종 피상적 변질의 결과였을 것이다. 한편 영국에서 발전은 이보다도 더욱 지지부진하며 모호한 것이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시샘이 날 정도로 특성화 복합적 스타일의 여러 요소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수태고지_레오나르도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이탈리아는 바로 그 르네상스를 통해서 예술의 절저을 맞았고, 그 패권을 쥐었음이 틀림없다. 고대 로마제국과 과트로첸토, 1400년대 사이의 이탈리아 예술의 산물은 수 세기 동안 일시적·피상적으로만 유럽 북부의 영향을 받았을 뿐, 지속적으로 전통을 추적할 수 있게 한다. 이 반도에서 고딕 스타일은 조직적으로 건축을 변형시키지 않는다. 시에나 대성당은 장식 스타일과 축조에 부분적인 차이는 있지만 오르비에토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그 본질적 구조에서 로마의 이상과 그것을 통한 고대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중세 회화와 조각의 경우에는 전반적으로 비잔티움의 위계질서를 따르고 있지만 몇몇 선구자들, 몇몇 천재적 '예고자들'을 헤아리게 한다.

 

중세의 이탈리아 미술은 일시적으로 지중해 고대 문화의 상속인 행세를 한다. 남 프랑스의 톨릭 교도들이 예배 의식에서 이교도의 기억을 그 화려한 겉치레로 되풀이하고 있었던 덕분에 고대 신화의 신들이 전적으로 금지되거나 잊혀진 적은 없었다. 온화한 기후와 이탈리아인의 다정한 보호자적 기질은 마치 낙원에서 추방된 사람들처럼 점점 더 영생에 대해 조급하게 한다. 어느 시대를 통해서나 그들의 성당은 상당히 끈질긴 요구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즉 유럽 북부의 대성당들이 항상 더 높이 솟아오르고 더 무모하게 약속은 받았지만 보이지 않는 천국을 향하는 것과는 다르게 전혀 야심적이지도 탐욕스럽지도 않았다. 이탈리아적 신념은 감각적인 눈이 그 상상력을 매혹하고 자양을 주는 그런 미적 몽상이다. 그곳에서 죽음은 해방이라든가 보상으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서 영벌은 해골이나 죽음의 춤 없이 표현된다. 14세기에 피사의 캄포 산토 묘소 벽 위에 그려진 <죽음의 승리>는 삶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시킨다. 또한 그로부터 이백 년 뒤에 시스티나 예배당 벽에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되고 그 신에 올림포스 신들과 같은 면모와 특징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 그는 그리스도를 아폴론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