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이탈리아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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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르네상스

by 작달비100 2024. 8. 22.

1250~1550년

중세 시대 후기인 1000년경부터 회화는 주로 수도원에서 제작되었다. 여기서 수도사들은 채색필사본을 장식하기 위해 금박과 일련의 양식화된 이미지들을 사용하곤 했다. 또 때때로 벽면들을 성경에서 추출한 단순한 장면들로 꾸미기도 했다. 이 시기에 제작된 대부분의 이미지 대체로 종교적이었다. 중세 후기 이전까지는 진정한 의미의 초상화~나 풍경화가 없었으며, 현실 삶의 형태를 그리려는 의도도 거의 없었다. 진실로 화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없었지만 중세 조각가들은 있었다. 13세기에 대성당이 있던 도시들, 스트라스부르와 나움부르크의 조각가들은 인체에 대한 지식을 지니고 실물과 같은 설득력 있는 조각상들을 만들었다. 그런데 실제와 같은 이미지를 그린 화가 없었고 동시대의 회화는 평면적이었고 생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조토가 피렌체에 당도하면서 바뀌었다. 조토의 작업은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을 시사했을 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피렌체 화가들과 그 후의 서양 미술에도 폭 넓은 영향을 미쳤다. 조토는 세상을 향해 열린 창문과 같은 회화를 만들어 냈으며 이는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그의 인물들은 더 이상 뻣뻣한 마분지 조각 같은 것들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견고함과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을 묘사할 수 있는 재능을 지닌 조토 설득력 있고 매혹적이며 깊은 동정심을 자아내는 종교의 이야기들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관객은 처음으로 이야기 속의 주요 인물들과 공감할 수 있었며, 이런 혁신적 접근법이 회화에 끼친 영향은 전혀 과장될 수 없다. 

조토의 프레스코화

조토 <라자로를 일으킴> 사진_위키미디어

 

서양 회화의 역사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기는 어렵다. 조토(Giotto di Bondone,1267~1337) 이전에도 화가들이 있었지만 조토가 단순하고 세월을 초월한 듯 보이는 화면 구성을 달성함으로써 서양 미술 전체가 새롭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조토는 살아 있을 때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교황과 나폴리 군주를 위해 작품을 제작했고, 그의 이름은 단테의 <신곡> 안에도 언급되었다. 조토 디 본도네는 피렌체 지역에 살던 농부의 아들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바위 위에 양을 완벽하게 모사함으로써 화가 치마부에의 눈에 띄었다. 조토는 스승이 된 치마부에로부터 그림을 빠르게 배웠으며 오래지 아 자신의 작업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의 작업장은 꽤 성공해서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에 있는 교회 건물들의 벽화를 그려 달라는 주문을 받곤 했다. 조토의 대부분 작품은 프레스코로 제작되었다. 이 프레스코 화법은 젖은 회반죽의 벽면 위에 물에 갠 안료를 건조되기 전에 곧바로 칠하는 것이다. 이 기법은 이탈리아 전역에 있는 예배당과 종교적인 건물들을 장식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조토의 가장 훌륭한 프레스코 작품은 파두아에있는 스크로베니 성당 혹은 아레나 예배당으로 불리는 건물 내부에 그려진 일련의 벽화들이다. 여기에 예수의 일대기와 동정녀 마리아의 일대기에 해당하는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그 또한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을 위해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벽화로 그렸다.

 

조토는 인간 형상을 그리는 회화 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헌 덕분에 이후로도 항상 인정받는 작가가 되었다. 그는 중세 비잔틴 전통의 양식화된 인물상에서 탈피하면서 자신의 그림에 등장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큰 사실성을 부여했다. 그래서 조토가 그린 인물들에는 실제의 인간 감정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과거의 회화에서 볼 수없던 다양한 감정들, 즉 경외감, 슬픔, 의심, 분노와 질투가 묘사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 그림에 펼쳐진 드라마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요인들이다. 주로 근접 묘사된 그의 서술식 회화에는 운동감도 나타나 있다. 인물들이 항변하듯 손을 들어 흔들거나 그럼직한 공간 안에서 무게와 거리를 지닌 채 몸을 숙이거나 기대고 있다. 또한 조토는 색과 빛이 상호작용하는 특별한 방식을 통해 색채에 대한 사실적 감각을 보여주기도 한다. 

시에나 화가들의 장식적 우아미

두초 <마돈나 데이 프란체스카니> 사진_위키미디어

 

만일 조토가 14세기 피렌체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라면 두초 디 부오닌세냐(Duccio di Buoninsegna,c. 1255~1319)는 시에나가 배출한 핵심 화가이다. 토스카나 지방의 피렌체와 시에나, 두 도시는 14세기 초 예술 분야에서 경쟁적인 역할을 했다. 이 중 시에나 화파는 종종 더 보수적이라고 여겨졌는데 이는 과거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화와 채색 필사본에서 보이는 것 같은 장식적 성경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서기 330년에 세워진 동로마 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비잔틴 전통은 기본적으로 종교 미술의 전통으로 양식화된 인물상과 기독교 상징을 통해 강력한 동방 정교회의 시각을 내세웠다. 조토와 그보다 정도가 덜했던 두초는 그런 제의적 관습에 도전하면서 보다 자연스러운 양식을 발전시켰다. 

 

오늘날에도 시에나의 중세 시가지에는 여전히 성당이 군림하고 있다. 이 성당을 위해 두초는 예순 장면이 넘는 두폭 제단화인 <마에스타 Maesta>를 제작하였고 이는 1311년 그곳 대성당에 설치되었다. 두초는 이 제단화의 서술적 장면마다 새로운 생명의 감각을 불어넣기 위해 신성한 인물상에 실제의 움직임을 묘사해 놓았다. 시에나 화파의 다른 중요한 대표 작가들로 두초이 제자인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c. 1284~1344)와 피에트로(Pietro Lorenzetti, c. 1280~1348), 암브로조 로렌체티(Ambrogio Lorenzetti, c. 1290~1348) 형제가 포함된다. 스승 두초의 빛나는 색채와 우아한 선묘를 가져와 작업했던 시모네 마르티니는 당시 나폴리를 다스린 프랑스 왕을 위해 그리고 좀 더 후에는 아비뇽 궁전에 있는 교황을 위해 그림 그리도록 부름을 받았다. 마르티니의 작품이 보여 준 세련되고 우아한 표현 방식은 중세 시대가 끝나 가던 유럽 전역의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로렌체티 형제는 아마도 두초 작업실의 조수들이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마르니티가 세련된 우아함으로 그리던 시기에 이들 형제는 조토의 영향을 받아 실측 적이고 서술적인 양식의 회화 표현을 더 선호했다. 암브로조 로레네티는 1338년과 1340년 사이에 시에나 시청사를 위한 프레스코 연작인 <선한 정부와 악한 정부>를 그렸다. 이 작품은 인상적이면서도 복잡한 구성의 예로 시에나의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는 작은 인물상들을 묘사함으로써 그때까지 본 적이 없던 숙달된 원근법을 나타내 보였다. 

조각적 입체감의 환영

마사초(Masaccio, 1401~1428)는 그가 이룬 많 회화적 혁신 덕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 중 한 명이 되었다. 피렌체 예술가인 마사초의 어린 시절과 화가 수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하지만 그의 이른 초기작들을 보면, 12세기 중반부터 번성했던 선적인 고딕 양식에 대한 명확한 거부가 있다. 마사초는 인물상을 설득력 있게 묘사한 조토와 동일한 관심사를 가졌다. 다만 그는 조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과 동시대 인물인 건축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가 발달시킨 원법을 회화에 적용하였다. 또한 마사초는 그 당시 도나텔로가 제작한 조각상들을 면밀히 살펴본 덕택에 이전 회화에서 절대 존재하지 않았던 조각처럼 견고하고 부피감 있는 인물상들을 그려 낼 수 있었다.  

 

피렌체의 브란카치 예배당에 있는 프레스코 연작 중 한 작품인 <아담과 이브의 추방 c.1425~1428>은 마사초의 빛과 공간 그리고 원근법에 대한 탁월한 혁신을 충분히 보여 준다. 아담과 이브의 신체는 기념비적 조각의 특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마치 3차원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몸짓과 표정도 하나의 광원에서 쏟아지는 빛으로 주의 깊게 조명되어 있으며, 그들 신체 뒤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몸의 볼륨을 암시하게 되어 있다. 화면의 공간 구성은 문에 대한 묘사에서 사용된 일점 투시 원근법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의 그림에 나타난 고조된 사실성과 형식의 엄격함, 직설성 덕분에 마사초의 회화는 이전의 수많은 중세 미술가가 그랬던 것과 달리 굳이 매혹적이거나 불필요한 쾌감을 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