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이국적 원시주의 '폴 고갱(Paul Gaugu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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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 원시주의 '폴 고갱(Paul Gauguin)'

by 작달비100 2024. 9. 22.

폴 고갱은 인상주의 여러 측면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의 예술을 위해서는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표적인 탈인상주의 화가이며 생전에는 높이 평가받지 못했지만, 오늘날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나 종합주의 색채론에 입각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고갱_타히티인 / 사진 위키미디어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과 어머니 알린 샤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당시 유럽은 한창 혁명 중이었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스는 당시 34세로 오를레앙에서 이주한 사업가 집안 출신의 자유주의 언론이었는데 신문에 낸 기고문 때문에 프랑스에서 추방령을 받는다. 1850년 프랑스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클로비스는 장모인 트리스탕의 연줄을 통해 페루에서 언론인 경력을 쌓고자 페루로 가는 배를 탔으나 심장마비로 배에서 사망한다. 페로에는 고갱의 어머니 알린과 18개월 된 폴 고갱 그리고 2살이었던 누나 마리만 도착한다. 6살까지 페루에 살던 고갱은 더 이상 페루에 머물 수가 없어서 프랑스로 돌아왔고 어머니는 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했다. 

 

고갱은 지역의 학교를 옮겨 다니며 명문으로 평가되던 루아레의 라 사펠-상-메스밍에 있는 톨릭계 소 신학교로 편입했고 3년을 보낸 뒤 상선 해병을 위한 도선사(導船士)가 된다. 이후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 2년 동안 복무한다. 1871년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증권회사에 취직했고 증권 중개인으로 큰돈을 벌었다. 증권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1873년 고갱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갱이 살던 곳 근처에 카페에 종종 인상파 화가들이 모였는데 그는 여기서 전직 증권 중인이자 화가로 전업한 에밀 슈페네커와 만나 친밀한 사이가 됐다. 1882년 파리 증권시장이 붕괴하면서 그는 더 이상 증권 거래로 수입을 얻을 수 없게 되었고 전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주식시장 붕괴는 미술시장 역시 위축시켰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취급하던 아트딜러 가운데 가장 큰 손이었던 폴 뒤랑 루엘 역시 큰 타격을 입었고 고갱과 같은 신규 작가의 작품을 구입할 여력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갱은 2년간 전속 계약을 맺고 작업하였으며 느리긴 하지만 차츰 인지도를 쌓게 됐다. 2년 동안 고갱은 피사로와 함께 작업하였으며 가끔 폴 세잔과도 작업했다. 

 

중년에서야 그림 그리는 일에 몰하게 된 고갱은 총 8회의 인상주의 전시회 중 5차례의 전람회에 작품을 전시했고 1876년에는 파리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해 입선하기도 했다. 그리고 1886년 그는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하기 위해 자신의 부인과 아이들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전업 작가가 되기로 한 것이다. 1896년 고갱은 브르타뉴에서 4년을 체류하며, 그곳에서 자신의 종합주의라고 명명한 새로운 미학을 만들어 냈다. 이 예술적 시도에 매료된 화가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고, 급기야 고갱은 일군의 화가들 사이에서 중심인물이 되었다. 종합주의에서 고갱이 의미하고자 했던 것은 그림의 형태가 눈으로 경험되거나 객관화된 방식에서 비롯되지 않고 선과 색의 상징적 패턴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 원시적이고 반자연주의적인 고갱의 표현법은 부분적으로는 중세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민속 미술에서 감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또한 그가 일본 판화를 보면서 찬미했던 저 대담한 색채와 장식적인 요소들도 그의 종합주의 회화 안에 자주 사용됐다. 고갱은 축약된 형태미와 리드미컬한 조형미를 띤 목판화도 제작했으며 석판화, 부조 조각, 수채화, 도자기 등 다양한 매체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1897-1889년/ 사진 위키아트

 

1891년, 고갱은 남은 삶의 대부분을 보내게 될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그가 간절히 원하던 것은 '새로운 양식'이었고 자신이 원하는 상징적인 새 화풍을 만들어내기 위해 순수함이 가득한 원시 사회로 떠난 것이다. 타히티섬, 외딴 장소에 정착한 그는 폴리네시아 원주민 곁에서 그들의 일상생활을 그려 나갔다. 고갱의 타히티 작품들은 서양 미술 전통이 아니라 섬 주민들의 민속 미술에 가까이 근접하려는 시도였다. 그리하여 인물 형상들을 더 단순화하고, 윤곽선을 뚜렷하게 하며 색채도 대담하고 극적인 색들을 선택해서 칠했다. 고갱은 원시 문화권의 예술에서 미적 영감을 발견한 최초의 화가 중 하나였다. 2년 동안 섬에 머물면서 마음껏 그림을 그린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이번 파리 입성은 그의 인생에 두 번째 도전이었다. 자신이 완성한 '새로운 양식'이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파리 미술계의 이목을 끌지 못했고, 그의 작품을 보고 혹평까지 해대는 사람들이 있었다. 실의에 젖어 다시 타히섬으로 돌아온 고갱은 대 걸작으로 불리는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를 2년에 걸쳐 완성했다. 이 작품은 오른쪽 아기에서부터 왼쪽 노인까지 유년기, 성년기, 노년기의 일생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이 얼마나 허무하고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를 하나의 캔버스 안에 담았다. 4미터에 이르는 이 거대한 작품을 마지막으로 고갱은 1903년 5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 표현주의자들에게서 대단한 찬미를 받은 고갱은 세기말에 상징주의 운동으로 알려진 나비파의 지도자였으며 20세기 초 반자연주의 미술의 핵심 주창자 중 하나로 간주한다. 죽고 나서야 화가로 인정받고 유명해진 고갱은 결국 자신이 원하던 '새로운 양식'을 만들었다. 그는 미술사에서의 한 획을 그을 만큼 거장이 되었고, 쿨루아조니즘, 상징주의, 종합주의 등의 화풍을 구현했으며 나아가 현대미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