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우아미의 시대 로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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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미의 시대 로코코

by 작달비100 2024. 9. 11.

16세기 티치아노의 거리낌 없는 자발적 붓질로부터 바로크 시대의 거칠고 대담한 회화를 지나 18세기 초의 보다 밝고 좀 허황한 면이 엿보이는 경향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 모든 회화를  근대 미술이란 하나의 흐름으로 묶을 수 있다. 그중 18세기 초에 새롭게 시작된 로코코 미술은 비대칭적 곡선과 장식, 유희성을 선호하는 양의 미술로 처음에 프랑스 인들을 사로잡은 데 이어 이탈리아와 서유럽의 다른 국가들에도 확산해 나갔다. 18세기는 유럽에 대단한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이다. 교회가 여전히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독단적 교리를 거부하거나 군주제의 절대적 권력에 도전하였다. 철학과 과학의 급진적인 성장은 개인의 생각과 이성의 힘에 대한 신뢰를 강화했고 중산층의 교육 확대와 더불어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열어 나갔다. 유럽 국가의 생활 수준은 해외 무역과 먼 이국의 식민지 경영 덕분에 점차 올라갔다. 일반적으로 자유와 변화를 지향하는 추세가 보편화되고 있었다. 

프랑스의 로코코 회화 

장-앙투안 바토는 프랑스 북동쪽의 도시 발랑시엔느에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나기 6년 전 이 도시는 네이메헌 조약에 따 플랑드르에서 프랑스 영토로 전입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의 회화에는 플랑드르 예술과의 강한 연대가 있었지만 그렇긴 해도 바토는 은 생애 동안 18세기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하나로 간주했다. 다른 어떤 예술가들보다도 그는 로코코로 알려진 프랑스 회화에 우아함과 정교함의 새 기법을 만들어 준 장본인이었다. 바토가 1702년 파리에 도착했을 때 미술계는 니콜라 푸생의 고전주의로 정점에 달해 있었다. 1708년경까지 바토는 무대 미술가인 클로드 질로와 함께 일했는데 질로는 그에게 이탈리아식 판토마임 연극인 '코메디아 델라르테'를 가르쳐 주었다. 이 연극은 배우의 즉흥 연기에 기반을 둔 희극으로 주요 등장인물에는 아를르캥과 어릿광대 같은 일단의 고정 캐릭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708년 이후 바토는 파리의 뤽상부르 궁전에서 클로드 오드랑의 지도 아래 회화를 공부했다. 그리고 이 궁전에 소장되어 있던 루벤스의 대연작 <마리드 메디치의 일생>에 나타난 활기차고 생생하며 소용돌이치는 인물 구성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바토가 한 장면 안에 많은 수의 인물을 배치할 수 있어서 주목받았다 하더라도 그의 인물 그룹은 루벤스의 경우처럼 정력적이거나 강건하지는 않았다. 바토의 회화 스타일은 훨씬 더 서정적이고 섬세했으며 절정기 작품에서는 새로운 로코코 정신의 우아하고 완벽한 본보기로 여겨졌다. 바토는 위대한 대한 색채 화가였으며 캔버스 위에 물감을 직접 바르고 하였다. 이 같은 방법은 훗날 들라크루아와 쇠라를 비롯한 신인상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주름 장식과 환상

바토가 프랑스 로코코의 새 정신을 선구적으로 알렸다면 프라수아 부셰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는 로코코 회화에 장식적 우아함과 경쾌한 매력을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양식을 가장 잘 구현해 낸 화가들이라 할 수 있다. 두 화가는 18세 중반 프랑스 궁정의 인위성과 피상성에 대한 취향을 작품에 반영해 냈다. 당시 귀족들 실크 드레스, 분칠한 가발, 러플식 옷 주름 및 리본 같은 화려한 의상과 패셔너블한 환경을 즐겼다. 그런데 부셰와 프라고나르가 시대와 연관하여 구현한 경쾌하고 화려한 것들 모두를 가치 없다고 묵살하기 쉽지만 그렇게 한다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그들의 표현 기술을 부하는 일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후대를 위해서 당시 귀족들의 현실에 무관심한 태도를 포착해 냈던 사실을 무시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파리 토박이인 화가와 레이스 디자이너 사이에서 태어난 프랑수아 부셰는 바토의 그림을 판화로 모방하면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727년에는 이탈리아로 가서 4년 동안 있다가 돌아왔으며 귀국 후에는 프랑스 궁정에서 대단한 성공을 누렸다. 그리고 1765년에 왕을 위한 궁정 과가 되었다. 부셰는 왕의 정부인 마담 드 퐁파두르가 선호했던 화가여서 그녀의 초상화를 여러 차례 그렸다. 그는 장식 예술가로 활동하기도 해서 베르사유 궁전을 위한 매우 정교한 실내 장식을 고안했으며 오페라 무대 디자인 아니라 태피스트리 디자인도 완성하였다. 

 

장-오노레 프라고나르는 샤르댕과 부셰의 제자였다. 1756년부터 1761년까지 이탈리아에 체류했으며 그곳에서 티에폴로의 회화 작품에 친숙했으며 그곳에서 티에폴로의 회화 작품에 친숙해졌다. 그는 티볼리 정원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이곳은 훗날 그 작품의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프라고나르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장르들 즉 초상화, 역사화, 풍경 속 목가적 장면들을 그렸다. 하지만 명성을 얻었던 것은 주로 정원을 배경으로 남녀가 몰래 애정을 나누는 그림을 그려서였는데 이 같은 그림들은 그가 나중에 악평받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사회풍자

윌리엄호가스는 런던에서 라틴어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대 사회를 풍자한 그림과 판화가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덕분에 그는 당시 영국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18세기 사회의 관습과 풍속을 다룰 때 호가스는 영국적 취향을 따라 심미적이기보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에 비중을 두었다. 사실 영국인은 자기 자신의 초상화나 그들의 모국 혹은 방문했던 외국의 경관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호가스의 영향력 있는 그림들은 그즈음 확산한 중산층은 계급에 어필했고 그들의 관심을 끌었다. 중산층은 교회와 귀족들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호가스의 멜로드라마 같은 그림들 안에 표현된 사회적 오류와 부도덕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호가스는 사회의 부도덕함을 조명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로코코 회화의 경박함과 과도한 유행 추종에 대해서도 격하게 반대했다. 호가스는 삶의 어두운 부분을 그린 자신의 그림들이 동시대 프랑스와 이탈리아 화가들이 보인 제멋대로 식의 방자한 우아함을 비판하는 작품으로 여겨지길 바다. 그는 확고한 민족주의자였으며 자신이 외국에서 밀려오는 가식과 허영의 파도에 대항하여 합리적인 영국적 가치관을 수호한다고 믿었다. 

단순성과 고요

장-바티스트-시메옹 샤르댕은 로코코 시대에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로코코 회화 달랐다. 그의 작품에는 쾌락을 추구하던 동시대인들의 허세 부리는 장식과 넘치는 호사가 없었다. 궁정 공예가의 아들로 태어난 샤르댕에게는 사실 로코코 미술가가 되기에 전혀 부족함 없는 배경과 경력이 있었다. 퐁텐블로 궁전에서 벽화를 복원한 적이 있었으며 잠 프라고나르의 스승이기도 했었다. 그림을 거의 독학으로 공부한 르댕은 평생 파리에서 살며 작업했다. 여기서 그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호화로운 풍경화나 우아한 인물 초상화와는 거리가 먼 자연주의 양식을 독자적으로 추구했다. 로코코 미술가들과는 대조적으로 샤르댕은 자신의 주변 일상을 주시하며 영감을 얻었고 처음에는 네덜란드 정물화에서처럼 동물과 과일을 소재로 한 작은 크기의 그림들을 제작했다. 그리고 1728년 그의 정물화 중 하나인 <가오리>가 그 리얼리즘 덕분에 프랑스 문인 디드로에게 극찬받으면서 마침내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샤르댕은 주로 집안의 장면들에 집중했다. 이 친밀한 내용의 그림들에는 종종 한 명의 인물을 그린 초상화들이 포함됐는데 그 주인공은 흔히 집안일을 하는 하녀인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섬세하고 꾸밈없는 풍속화들은 화가가 본 것에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추어 감상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노동의 존엄성에 대한 직설적인 묘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