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여성적 시선-인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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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적 시선-인상주의

by 작달비100 2024. 9. 21.

인상주의 안에는 두 명의 여성 화가인 마리 카사트(1844-1926)와 베르트 모리조(1841-1895)가 있다. 이들은 드가, 마네, 모네, 피사로를 포함한 남성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며 작품 전시를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여성 작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주제는 제한적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때는 여성이 남성과 방안에 단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던 시기였다. 그래서 여성 인상주의 화가들은 일면 자신의 필요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다른 면으로는 강요된 여성적 시각 때문에 여성과 아이들을 모델로 삼았다. 일반적으로 여성성은 그 당시 미술계에서 별로 찾아볼 수 없었던 까닭으로 나름 독특하고 독창적인 기여가 될 수 있었다. 

 

마리 카스트는 미국의 피츠버그 출신이지만 유럽이 제공해 줄 예술적 도전과 모험을 동경한 나머지 부친의 허락 아래 대서양을 건너오게 된다.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에서 먼저 공부를 한 후, 그녀는 평생의 친구이자 멘터가 될 드가를 만나 파리에 정착한다. 카사트는 1877년부터 1881년까지 인상주의자들과 함께 전시를 했다. 드가와 마찬가지로 카파트도 많은 파스텔화를 제작했으며 우키요에 전통의 일본 판화들에서 영감을 얻어 석판화와 동판화를 제작했다. 그녀의 여성과 아이들 그림, 특히 일반적으로 '엄마와 아이' 테마로 언급되는 작품들은 지나치게 과도한 감상 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성격으로 묘사됐다. 드가는 이 같은 카사트의 그림이 "인물의 피부와 의복 위에 드리운 빛의 반사와 그림자를 묘사하는 데 집중됐으며 그 점에 있어 그녀는 최고의 예리한 느낌과 지각을 할 줄 아는 화가"라고 평가했다.

 

베르트 모리조는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으로 로코코 화가 프라고나르의 증손녀이자 에두아르 마네의 처제이며 제자였다. 1868년에 그녀는 마네의 작품인 <발코니>를 위한 모델이 됐는데 당시의 예절에 맞게 자기 모친이 참여한 가운데 포즈를 취했다. 모리조는 코로에게서 그림을 배웠으며 총 8회의 인상주의 전시회 중 7차례나 전람회에 참여했다. 하지만 동시대 여성 화가들에게 주어진 제한에서 그녀도 자유롭지는 못했다. 모리조 역시 가족 구성원들이나 자기 삶에서 찾은 평범한 실내 장면들을 그림 안에 자주 포함시켰다. 모리조는 많은 소녀들 혹은 젊은 여성들을 매력적이며 친근한 초상화로 묘사해 냈는데 이 그림들은 대체로 소녀에서 성숙한 여성이 되어 가는 과정을 별다른 감상 없이 기록해 보여 준다. 흥미롭게도 그녀는 평생 모네나 르누아르, 시슬레보다 더 많은 그림을 팔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메리 카사트 <엄마의 포옹>

마리카사트, <엄마의 포옹> 1890-91년 

이 다색 판화는 카사트가 여러 차례 선택했던 테마인 엄마와 아이를 묘사하고 있다. 그녀 자신은 독신이었지만 자녀가 있는 친구 혹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서, 그들을 그림으로 재현해 내는 것을 즐겼다. 여기서 아이의 약간 어색한 자세는 이 그림이 지나게 감상적이 되는 것을 막아 준다. 

 

베르트 모리

베르트 모리조, <버찌나무>, 1891년

두 소녀가 나무에서 버찌 열매를 따고 있다. 다른 대부분의 작품에서처럼 이 작품에서도 모리조는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소재에 초점을 맞췄다. 그녀는 이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 장의 스케치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후기 작품에서도 모리조는 자연 대상을 보면서 직접적인 관찰에 따 순식간에 그려 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미국 출신의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1834-1903)는 1855년에 모국을 떠나 파리로 갔다. 이곳에서 휘슬러는 사실주의 화가인 샤를 글레르 밑에서 그림을 배웠으며 초기에는 취스타브 쿠르베의 회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마네와 드가를 만난 이후 휘슬러의 그림 스타일에 변화가 찾아온다. 그래서 그의 1860년대 그림에는 인상주의에 가까운 유사함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휘슬러가 인상주의 운동에 완전히 결부된 것은 아니었다. 댄디한 취향과 위트 감각을 가졌던 그는 런던으로 이주해 그곳 문인 서클에서 오스카 와일드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친구가 된다. 물론 파리의 시인 보들레르와의 교류도 지속됐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인 예술 지상주의를 확고하게 신뢰했으며 이 신념을 1855년 파리에서 행한 한 강연에서도 옹호하였다.

 

영국인 화가 그웬 존(1876-1939)은 그녀의 남동생인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슬래이드 미술 학교에서 기초를 배웠다. 1903년 파리로 이주한 존은 휘슬러에게 다시 회화를 배우는데 이 기회에 휘슬러는 존이 미묘하고 섬세한 회색의 색조를 쓰도록 영감을 불어 넣었다. 존은 프랑스에서 거의 평생 살았지만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의 불행한 사랑 후에는 은둔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다락방을 여러 차례 그렸는데 그 그림들은 주로 고요한 내적 성찰의 이미지다. 하지 보통 추측하게 되는 자폐적인 노이로제나 고뇌의 이미지는 절 아니었다. 존은 1913년에 가톨릭 신자가 되면서 "내 종교와 내 예술, 바로 이것들이 내 삶이다"라고 선언했다. 존의 작품에는 상당수의 자화상과 수녀 초상화들, 몇몇 개별 여성과 소녀들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이 초상화들은 절제되고 차분하며, 고요한 침묵의 매력을 띤 동시에 차갑고 미묘한 색조들을 사용하여 정밀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