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서양미술사_북유럽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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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_북유럽 르네상스

by 작달비100 2024. 8. 27.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한창 기세를 끌어올리는 동안 네덜란드와 독일에서도 새로운 회화의 시대를 암시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북유럽 도시들인 겐트, 안트베르펜, 브뤼헤의 미술가들이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위대한 혁신을 어느 정도 알 있었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작품은 남쪽 미술가들의 작품과는 현저한 차이를 나타냈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는 휴머니즘과 고전적 고대의 부흥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북유럽 미술가들은 이탈리아 동료들에 비해 이상적인 조화와 미를 획득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15세기에 걸쳐 북유럽의 건축은 끝이 뾰족한 아치와 풍부한 장식, 그리고 둥근 궁륭 천장이 특징인 과거의 고딕 양식을 계속 지속시켜 나갔다. 그러나 북유럽의 화가들은 회화에서 그때까지 수요가 많았던 품위 있는 우아함과 극도의 장식성을 거부하면서 고딕 전통으로부터 서서히 탈피하고 있었다. 

 

북유럽에서 미술의 변화는 종교 개혁을 배경으로 하여 가톨릭교회에 대한 저항으로서 일어났다. 원근법 또는 해부학의 과학적 발견과 같은 이탈리아인의 혁신적 측면은 북유럽 미술가들 사이에서 큰 흥미를 끌지 못했다. 이들은 그보다 경이로운 자연의 세계를 그대로 재현해 내려는 열망이 더 컸다. 따라서 북유럽 르네상스의 미술가들은 자연주의에서 탁월한 진전을 이루었다. 이들의 회화는 세상의 거울과 다름없어서 모든 나뭇잎과 사람의 머리카락 그리고 주름진 벨벳 옷자락까지 정교한 세부 묘사로 모사되었다.  

아르놀피니 초상화/ 사진 위키메디아

 

같은 시기에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선호했던 회화 제작 방법은 템페라였다. 이 제작에서는 안료를 빨리 마르는 계란 노른자 혹은 계란 전체에 섞어서 물감이 먼저 건조된 계란 매제 속에 떠 있게 하는 기법이었다. 반면 유화는 네덜란드 화가인 얀 판에이크가 발견했다고 오랫동안 믿어졌다. 실제로 그 기법을 창안해 낸 사람이 얀 판에이크인지 혹은 그의 형제인 후베르트인지에 대해 의혹이 제기되고 있긴 하지만 그들이 안료를 린시드나 호두 기름에 섞어서 건조 과정을 늦추는 기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분명한 점은 얀 판에이크가 유화 매체를 가장 일찍 사용한 작가들 중 하나란 점과 나무 패널 위에 글레이즈(광택)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동시대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번쩍이는 광택 나는 유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15세기 초 네덜란드에 나타난 그림들은 회화적 현실성이라는 놀라운 만큼 새로운 깊이를 담고 있었다. 과거 고딕 양식이 보여 준 우아한 장식 요소들을 거부한 채, 이 그림들은 실재 세계를 향해 열린 창문이 되었다. 그래서 일상의 실내 광경을 볼 수 있게 하고 대상을 세밀한 세부까지 묘사해 보여주었다. 이 같은 새로운 자연주의의 주창자로서 네덜란드의 거장인 얀 판에이크(Jan van Eyck, c.1390~1441)보다 더 훌륭한 작가는 없다. 판에이크는 자신의 숙달된 유화 실력에 힘입어, 세계를 놀랍도록 정교하고 세밀하게 그렸다. 형제 후베르트와 함께 작업한 얀 판에이크는 그때까지 템페라로 작업하던 화가들이 사용하던 계란을 대신해 다양한 색의 물감과 오일이 혼합된 유성 안료를 실험했다. 이 선구적인 투명한 매체 덕분에 그는 그림에 생생한 광택을 주는 반투명 색채의 층을 쌓게 되었고 이로써 완벽한 화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얀 판에이크 <아르놀피니의 결혼>, 1434년/ 사진 위키메디아

 

판에이크가 놀랄 만한 세부 묘사로 세상을 그려 내보일 수 있었다면 다른 네덜란드 화가들은 또 다른 자연주의적 묘사로 진일보하였다. 로히에 판데르베이덴, 후고 판데르후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는 영적이고 종교적인 주제를 새로운 명료성과 목적의식으로 묘사했는데 이들은 모두 일상의 사물과 사람들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을 뿐 아니라 인간의 폭넓은 감정의 폭도 그대로 묘사하고자 했다. 판화 발명 북유럽에서 이룩한 또 하나의 거대한 진보였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누구나 우러러보았던 인물로 목판화와 동판화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그는 기술적 능력에 더해 작품의 세부에도 전념함으로써 매우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뒤러의 판화를 리플렛과 서적에 실리는 삽화로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함으로써 이제 그림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귀족만이 아니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풍경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적절한 주제가 된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몇몇 북유럽 화가들 특히 루카스 크라나흐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가 그들 눈앞에 있는 주변 경관인 숲과 바위 들판을 그렸다. 이들의 그림에는 명백한 이야기나 메시지가 없었으며 심지어 사람의 모습조차 그려져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초상화는 이즈음 북유럽에서 중요한 미를 지니기 시작한 또 하나의 회화 장르였다. 뒤러의 통찰력 있고 가슴을 울리는 초상화로부터 소(小) 한스홀바인이 그린 영국 귀족의 위엄 있는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 초상화의 발전은 괄목할 만했다. 

 

남부 유럽에서 새롭고 놀라운 이념을 전달하는 최선의 표현 방법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면, 북유럽에서는 반대로 회화가 반드시 지속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됐다. 15세기 무렵, 네덜란드는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지속되는 기근과 전쟁, 전염병들은 심리적 공포와 불안정을 확산시켰고 이는 가톨릭 종교에 대한 신뢰를 뒤흔들었다. 반면 프로테스탄티즘이 성장하면서 회화를 '가톨릭의 우상 숭배'의 한 종류로 여긴 나머지 그것을 법으로 금하거나 심지어 불태우기도 했다. 15세기 초에 그려진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초현실적이고 비관적인 그림은 선견지명이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그의 패널화들은 중세의 상징들로 가득하며 당대의 불확실함과 그 와중에 도사린 지옥에서의 공포가 드러나 있다. 보스의 악몽 같은 장면들은 나중에 대(大) 피테르 부뤼헐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후자의 농민 풍속화는 소작농의 일상 삶을 그리거나 그즈음까지 회화를 지배하던 종교화를 벗어나 미술이 새로운 방향으로 접어들도록 이끌었다. 

 

15세기 초 네덜란드에 나타난 그림들은 회화적 현실성이라는 놀라운 만큼 새로운 깊이를 담고 있었다. 과거 고딕 양식이 보여 준 우아한 장식 요소들을 거부한 채, 이 그림들은 실재 세계를 향해 열린 창문이 되었다. 그래서 일상의 실내 광경을 볼 수 있게 하고 대상을 세밀한 세부까지 묘사해 보여주었다. 이 같은 새로운 자연주의의 주창자로서 네덜란드의 거장인 얀 판에이크(Jan van Eyck, c.1390~1441)보다 더 훌륭한 작가는 없다. 판에이크는 자신의 숙달된 유화 실력에 힘입어, 세계를 놀랍도록 정교하고 세밀하게 그렸다. 형제 후베르트와 함께 작업한 얀 판에이크는 그때까지 템페라로 작업하던 화가들이 사용하던 계란을 대신해 다양한 색의 물감과 오일이 혼합된 유성 안료를 실험했다. 이 선구적인 투명한 매체 덕분에 그는 그림에 생생한 광택을 주는 반투명 색채의 층을 쌓게 되었고 이로써 완벽한 화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