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북유럽 르네상스(1400~1600)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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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르네상스(1400~1600) 들여다보기

by 작달비100 2024. 8. 28.

종교 회화

얀 판에이크의 정밀한 작품에 드러난 네덜란드의 새로운 자연주의는 곧 관심을 끌기 시작했으며, 1450년대 중반에는 그 영향력이 다른 지역에도 미쳤다. 플랑드르 작가인 로히에 판데르베이덴(Rogier van  der Weyden, c. 1400~1464)과 후고 판데르후스(Hugo van der Goes, 1440~1482), 그리고 독일 작가인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hias Grunewald, c. 1470~1528)는 거의 종교적 주제로만 작업했다. 이전과 달리 그들의 종교화에는 예리한 지향성과 명료성을 부여하는 자연주의적 접근법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판에이크의 작품에 마치 현실을 유리 아래 가두어 놓는 것 같이 어떤 인위적 요소가 있었다면, 이들 후기 플랑드르 미술가들의 작품에는 보다 따뜻하고 감정적인 느낌 내지는 인간적인 감성이 있었다. 판데르베이덴은 15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르군디 공국의 군주의 '선한 필립(Phillip the Good)'의 공식적인 궁정화가였다. 그의 명성이 널리 퍼졌기 때문에 그의 그림들은 심지어 스페인과 이탈리아로도 보내졌다. 판데르베이덴의 작품은 가까이에서 본 장면을 세밀하게 그리는 것과 중요한 종교적 장면들을 가슴 울리는 감동의 묘사로 달성하는 파토스적 표현으로 유명했다. 이 감정적 강렬함은 또한 후고 판데르후스의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판데르후스는 매우 커다란 크기의 종교화들을 제작했는데 그중 포르티나리 제단화에서는 아기 그리스도 주변에 모여든 엄청나게 큰 인물들을 표현했다. 매우 어두운 종교적 상상과 연관된 작품을 제작한 화가는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였다. 이 독일 미술가는 주로 인간의 고통에 관해 초점을 맞췄다. 그의 걸작인 제단화는 알자스 지방의 이젠하임에 있는 수도원 성당 병원을 위해 제작되었는데 여기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받는 그리스도가 그려져 있다. 팔다리가 뒤틀리고 찢어진 상처로 뒤덮인 몸이 비틀어진 채 극도의 괴로움을 겪는 모습을 잔혹하리만치 세부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관찰과 집념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1498년 /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북유럽 르네상스를 이끈 미술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는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금세공사였던 부친은 어린 뒤러에게 은필화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은필화의 선은 쉽게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이 방법은 그로 하여금 일찍부터 숙련된 선묘 기술을 습득하게끔 했다. 또한 면밀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에 전념하도록 불길을 댕겼는데 이러한 대상 관찰과 정확한 묘사에 대한 집념은 초기의 다른 영향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초기의 다른 영향이란 당시 뉘른베르크의 선도적 화가이자 삽화가였던 미하엘 볼게무트에게서 받은 것이었는데 뒤러는 1484년 그의 작업실 수습생이었고 그로부터 목판화의 기술을 배웠다. 뒤러는 화가로서 경력 초기부터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뛰어난 소묘 실력 덕분에 곧 독일의 대표적인 미술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작품 생산량은 굉장해서 평생 200점 이상의 목판화 작품들을 완성했다. 1496년 이후로는 여러 차례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며 그곳에서 일어난 혁신적인 예술의 변화에 깊이 감동하였다. 뒤러는 몇 점의 자화상을 제작했는데 그 자체가 상당히 새로운 것이었다. 1498년의 자화상에서 화가는 자신을 위엄 있고 확신이 넘치는 여행자로 나타냈다. 곱슬머리에 기품 있는 의상을 잘 차려입은 화가는 자신의 알프스 여행을 상기시키려는 듯 멀찍이 눈 덮인 산이 있는 풍경을 뒤로 한 채 자세를 취하고 있다. 뒤러는 자신을 르네상스인으로 분명하게 자각했기에 르네상스 운동의 전반적인 정신적 배경에 대해 진지한 호기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소논문들을 쓰기도 했다. 뒤러의 진정한 명성은 그의 세밀한 에칭과 목판화, 수채화 작품들에서 비롯되었다. 이 작품들은 뒤러가 자신의 주변 세계를 과학적 정확성으로서뿐만 아니라 감수성과 우아함으로 묘사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추었음을 보여 준다. 

초기 풍경화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레겐스부르크 근처의 다뉴브 계곡> 1520년 /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15세기에 이르기까지 '풍경화'라는 장르는 없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에 그려진 광경들은 막대 사탕 같아 보이는 나무들로 심하게 양식화되었거나 가파른 계단 모양의 언덕들이 설득력 없는 거리감을 엮어 낼 뿐이었다. 북유럽 화가들로서는 최초로 두 명의 독일 화가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 c. 1472~1553)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c. 1480~1538)가 회화적 영감을 위해 주변 가까이에 있는 소나무 숲과 바위투성이 대지를 바라보며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둘 다 다뉴브 화파에 속해 있었는데 이 느슨한 그룹의 미술가들은 주로 독일 지역 풍경을 탐구하는 데 열의를 보였다. 루카스 크라나흐브는 뒤러보다 단지 한 살 더 많았을 뿐인데 그의 작품은 놀랄 만한 자연주의적 세부 묘사에도 불구하고 뒤러가 보인 지칠 줄 모르는 집중력을 보여 주진 못한다. 완전한 풍경화는 아니지만 크라나흐는 자신이 성장했던 독일의 울창한 숲을 그려서 어두운 숲을 그의 회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만들어 놓았다. 알트도르퍼는 알프스산맥의 지형을 그린 뒤러의 수채화들을 찬미했다. 그러나 뒤러처럼 여행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알드도르퍼의 작품인 <다뉴브 계곡>에는 사람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으며 드넚게 펼쳐진 하늘에 단지 구름만 모여들고 있을 뿐이다. 화면 아래에 빽빽한 숲이 음울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먼 원경에는 푸른 산이 보인다. 알트도르퍼는 자연 풍경이 주는 압도적이고 감정적인 효과를 알기 시작한 최초의 전정한 화가가 된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는 자연 풍경에 비해 왜소해 보이는 작은 인물들이 그려지기도 했다.

독창적 환상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c.1450~1516 )의 이름은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 도시 스헤르토헨보스에서 따왔다. 보스가 어떻게 살았었는지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하지만 그가 지역 종교 단체의 일원이었으며 도시의 영적 쇄신을 위해 일하던 가톨릭 그룹에 속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교회 건물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디자인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의 종교적 믿음이 정통 가톨릭이었다 하더라고 그의 대다수 작품은 분명히 그렇지 않았다. 보스 작품에 양식적으로 연결시킬수 있는 유일한 선행 미술은 중세의 채색 필사본에서 발견되는 세밀화들이다. 보스의 회화는 성서 장면들에 대한 해석을 보여준다. 보스는 인류 앞에 놓은 수많은 유혹과 죄인들을 기다리는 끔찍한 결과를 자신의 고유한 도상 기호와 상징 그리고 암시로서 화면 가득히 꾸며 냈다. 그의 작품은 인간 조건에 대한 심오한 언급일 뿐 아니라 중세 세계관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중세의 비관주의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이러한 작품들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확산하기 전까지 16세기에도 위세를 떨쳤다. 보스는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찬사를 받았으며 특히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보스의 사후에 한 달 동안 열렬한 작품 수집가가 되었다. 사람들로 붐비고 활기 넘치는 보스의 그림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동시대 화가인 대(大) 피테르 뷔뤼헐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후 그는 19세기까지 거의 잊혔다가 20세기의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재발견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