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바로크 시대의 자유분방한 표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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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시대의 자유분방한 표현력

by 작달비100 2024. 8. 29.

르네상스가 끝나갈 무렵 베네치아에서는 티치아노가 자유분방 표현의 붓질과 찬란한 색채로 회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시도는 또 다른 베네치아 화가인 틴토레토에게 이어졌으며 교회 안에 걸린 그의 커다란 작품들은 과장된 공간감으로 매너리즘의 경향을 나타냈다. 전성기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의 기간에 걸친 매너리즘 미술은 주로 선묘 중심의 미술로서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배경 위에 왜곡된 인체 형태를 보여 주었다. 틴토레토와 엘 그레코는 스케일의 불일치와 색채의 부조화를 포함하는 매리즘의 특징들을 잘 보여 준 작가들이다. 그러나 매너리즘 양식의 가장 전형적인 예는 파르미자닌노에게서 발견된다. 그의 그림들은 공간의 변형과 인물들의 길쭉한 형태에 대한 실험이었다. 

 

티치아노<골리앗에 대한 다비드의 승리> 1542/ 사진:위키미디어

 

17세기 초 유럽의 대부분이 커다란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격변에 직면하고 있을 때 새로운 미술이 표면에 떠올랐다. 바로 바로크 양식으로 알려진 미술이다. 이 경향은 로마에서 시작됐으며 주로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번성했다. 바로크라는 이름은 나중에 붙었으며 격한 운동감과 강력한 감정의 회화 자주 결부되었다. 바로크 미술가들은 현실에 대한 환영을 한층 더 납득할 만하게 만들어 르네상스 시대의 자연주의를 앞질러 나갔고 감상자를 작품의 연극성에 몰입시키는 일에서도 더 멀리 나아갔다. 이러한 바로크의 회화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실체에 관한 것이었다. 회화의 형태들은 증류된 고체처럼 견고했고 빛과 그림자의 대조로 빚어진 인체들은 실제 인간처럼 그럴듯해 보였으며 설정된 무대 위에서 감정 섞인 드라마를 실연해 냈다. 바로크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은 빛과 그림자의 강한 대조에 있는데 그 덕분에 극적인 효과가 증대되고 풍부한 색채와 표현적 제스처가 돋보였다. 또한 대각선들의 상호작용은 화면에 강한 역동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르네상 시대 동안 피렌체와 베네치아가 이탈리아의 주요한 예술의 중심지였다면 바로크 시대에는 로마가 예술의 중심 도시였다. 1592년 위대한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가 밀라노에서 로마로 이주해 왔다. 그 당시 로마는 수많 다른 유럽 작가들에게도 예술 활동을 위한 목적지였다. 카라바조는 정통이 아닌 이단적인 작가였다. 그는 예비 드로잉도 없이 실제 모델을 두고 캔버스에 직접 그렸는데 이런 점은 작품을 주문했던 성직자들을 종종 실망케 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플랑드르의 톨릭 화가였던 루벤스는 작품과 삶이 더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논란도 일으지 않았다. 균형 잡힌 열정과 이성적인 작업 방식으로 많은 찬탄을 받았던 작가는 플랑드르의 바로크 초상화가인 앤소니 반다이크였다. 바로크 시대를 특정 지은 또 한 가지는 네덜란드 회화이다. 이곳 작가들의 기여 덕분에 이 시기는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시대라고 알려져 있다.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며 작업한 렘브란트는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작가인데 모델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 있는 초상화들을 제작해 내는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외 상당수 네덜란드 미술가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바라보며 화려한 정물화 혹인 활기찬 풍경화를 제작했다. 

티치아노(Tiziano Vecelli, c. 1488~1576)

티치아노(Tiziano Vecelli, c. 1488~1576)는 16세기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하고 다재다능한 화가 중 한명이다. 돌로미테에서 태어난 티치아노는 소년 시절부터 베네치아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모자이크 제작자의 견습공이었다가 이후에 조반이 벨리니의 작업실에서 회화를 배웠다. 그다음에 다시 조르조네의 작업실에서 수련함으로써 당시 베네치아에서 가장 뛰어난 교육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티치아노의 첫 번째 중요한 작업은 파두아에서 세 점의 프레스코화를 완성 일이었다. 젊은 시절 스승들이었던 조르조네와 벨리니가 죽은 1516년 이후부터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공식 화가로 임명되었다. 이후 티치아노는 눈부신 사회적 성공을 누리며 베네치아의 부유한 지식인 계층이 선호하는 화가가 되었다. 그의 작업은 초상화와 종교화, 신화화를 아우르는 넓은 영역에 걸쳐 이루어졌다. 티아노는 여행하기를 주저했지만, 페라라, 우리비노와 만토바의 통치자들로부터 쇄도하는 주문을 받았다. 그의 회화 작품들은 당대 이탈리아의 가장 유력한 가문들에 관한 많은 정보를 그르쳐 준다. 그는 교황 바오로 4세의 어린 손자의 초상을 그렸을 뿐 아니라 귀족인 스트로치 가문의 어린 딸의 초상화도 그렸다. 1529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를 만나 초상화를 그렸고 이어 1533년에는 황제의 궁정 화갈 임명됐다. 또한 황제의 후계자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 따라서 티치아노의 위상은 미켈란젤로에 비결될 만큼 대단했다. 실제로 그가 바티칸에 초대되어 머물 때 당시 60세였던 미켈란젤로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90세까지 장수했으며 유행성 역병에 걸려 죽었다고 전해진다. 

 

티치아노는 자신이 선택한 매체인 유화를 한껏 즐겼다. 가령 보다 직접적이고 표현적인 방식으로 유화 물감을 사용하기 위해 근대의 표현법을 예고하듯이 붓과 손가락을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화면에 밑칠한 다음 그 위에 광택제와 밝은색 물감들로 채색하는 자신만의 기술을 개발하였다. 한편 티치아노에게 있어 밝은 빛과 배경의 풍경은 주된 관심사였고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늘 자신감과 행복한 기운이 넘쳐났다. 그의 화화의 따뜻하고 풍부한 색조는 이후로 줄곧 다른 화가들의 회화에도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