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미학과 정신 분석: 로저 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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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과 정신 분석: 로저 프라이

by 작달비100 2024. 7. 26.

로저 프라이는 1866년 런던의 독실한 퀘이커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드워드 프라이(Sir Edward Fry)는 엄격한 원칙주의자였고 어머니 마리아벨라(Mariabella)와의 사이에 자녀를 아홉 명 두었다. 그들은 자신의 부를 미덕이라고 생각했고 타인의 가난은 죄악이라고 비난했기 때문에 나중에 로저 프라이는 자기 부모의 가치관을 '소박한 인간애가 절여 된 것'으로 묘사했다. 그는 사립학교에 들어가 반장이 되었으나 가학적 성향을 가진 교장으로부터 매주 매질을 당했다. 그 결과 프라이는 일생 폭력을 증오하게 되었다. 어머니에게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어머니와 생전에 계속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아버지와는 과학에 대한 열정을 함께 나눠었다.

로저 프라이 /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프라이는 자신을 화가라고 생각했는데 이 직업은 그의 아버지 마음에는 전혀 들지 않았다. 여하튼 결국 프라이는 예술가가 아닌 비평가로 두 대륙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형식주의 미학에 관해 광범위하게 강연하고 출판했으며,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회화 담당 큐레이터로 근무했고, 1933년부터 1934년까지 케임브리지에서 강의했다. 프라이는 문학에서뿐 아니라 미술에서도 형식의 고전적 순수성에 배치되게 내용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했다. 프라이는 블룸즈버리 그룹(Bloomsbury Group)에 가입했고 클라이브 벨과 그의 부인 바네사(프라이의 애인이기도 했음), 그리고 그녀의 여동생이며 프라이의 전기를 쓴 버지니아 울프와 친구가 되었다. 울프는 정신분석학에 양면적 입장을 취했지만 그것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모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을 거북하게 여겼다. 블룸즈버리의 다른 두 멤버인 앨릭스와 제임스 스트래치는 프로이트의 저술을 번역했고 제임스는 그 총서의 편집자가 되었다. 프라이 자신도 정신분석학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았다. 그는 1919년 3월 바네사 벨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로이트의 전기를 쓴 영국인 정신분석학자 어네스트 존스의 글을 읽고 있다고 했다.

 

프라이가 미술의 주제와 도상을 무시한 것은 그가 정신분석학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점과 관계가 있다. 예컨 그는 프로이트가 1910년에 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심리 분석적 전기나 1914년에 쓴 미켈란젤로의 <모세>에 대한 에세이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비록 프라이 자신이 인정하지 않았으나 그가 정신분석학과 연관될 수 있는 것은 회화의 세부가 마치 손으로 쓴 글씨처럼 그 화가의 성격을 드러낸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인 휘슬러의 철학을 싫어했고 조토와 이탈리아 화가들이 보여준 고전 미술의 '질서'를 더 좋아했다. 그는 또 비서구 미술과 어린이 미술, 현대미술의 표현성을 높이 평가했다. 1906년에 이미 프라이는 세잔에게 관심을 갖고 그가 모더니즘과 형식의 순수성을 결합시켰다고 생각했다. 프라이는 후기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세잔은 감정적인 효과를 위한 색채를 추구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로저 프라이 "베네시아" /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프라이는 세잔을 현대의 어떤 중요한 미술가보다 더 중요시했다. 그에게 있어 세잔은 개인적인 동일시의 대상인 동시에 존경하는 우상이었다. 프라이는 1927년에 세잔의 발전 과정에 대한 연구서를 발표하면서 세잔의 정물을 모방한 자 작품을 표지로 사용했다. 그 책은 세잔과 프라이 세대 예술가들의 부자지간 같은 관계를 언급하면서 시작된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성장한 우리 세대의 예술가들은 세잔을 그들의 부족 신으로, 토템으로 여긴다." 프라이가 모사한 세잔의 초상화는 그가 틀림없이 세잔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했다는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세잔의 초기 그림들은 성적이고 폭력적인 주제들을 자유로이 묘사한다. 모더니스트의 관점에 따라 이러한 내용을 단념한 후 그는 형식의 추구에 집착했고 이는 입체파로 이져 화가들이 화면을 다루는 법을 혁신 시키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조형적이고 구성적이며 질서가 잡히고 잘 통제되었으며 동시에 매우 복합적이었다. 미술사학자 쉬프(Shiff)가 말하기를 "프라이는 세잔의 시도에서 찾을 수 있는 영웅적인 면은 자신의 강박관념을 탐구하고 극복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하려 하기보다는 그 강박관념으로부터 자기의 예술을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한 점에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또한 프라이는 미술에 대한 세잔의 헌신과 그것을 추구한 용기를 칭송했다. 그는 세잔이 "세상의 멸시와 대중의 비난, 그리고 그가 피신처로 삼았던 철저한 고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적을 버릴 수 없었던 단호한 탐험가"라고 기록했다. 

 

세잔이 혼란스런 내용을 포기하고 형식적 질서를 세운 점과 그의 용기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로저 프라이는 자신의 사생활을 지배한 비정상적인 상태를 통제할 수단을 세우고 싶어 했다. 1896년 12월 프라이는 헬렌 쿰브(Helen Coombe)와 결혼했다. 그녀는 12남매 중 하나였고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디자인한 화가였다. 그는 서른 살이었고 그녀는 서른둘이었다. 프라이의 부모는 헬렌이 가난한 예술가인 데다가 퀘이커 교도가 아니며 건이 나쁘다는 소문이 있다는 이유로 이들의 결혼을 반대했다. 헬렌은 1892년 6월 경화된 연골이 두뇌를 압박하여 처음으로 정신이상을 보였으며 나중에도 그런 일이 있었으므로 건강의 문제는 근거가 없는 반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두서없고 난폭하며 남편에 대해 편집증도 보였다. 9년 후인 1901년 잠시 안정되었던 시기에 아들 줄리안이 태어났고 1902년에는 딸 파멜라가 탄생했다. 그러나 헬렌의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로저 프라이는 사회활동에서 계속 위축되었으며 특히 그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일할 때는 여행조차 할 수가 없었다. 재정가인 모건(J. P. Morgan)과의 불화로 큐레이터 일에서 해고당할 무렵 헬렌은 무기한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911년 프라이는 바네사벨과 사귀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 프라이는 자기 사생활에 결핍된 것을 찾고자 미술로 전환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과격한 도상이 형식적인 질서로 바뀐 세잔의 그림에 매료된 것은 그 화가의 중요성에 대한 현실적이고 정확한 평가와 혼란스런 내용을 피하려는 욕구를 결부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네사 벨에게 쓴 한 편지에서 프라이는 "헬렌을 알게 된 후 나는 이 세상이 상상치도 못할 끔찍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썼다. 그러한 '끔찍한 일들'은 자기 부인의 정신이상에서 드러나고 표현된 무의식의 요소이기 때문에 프라이는 내용의 중요성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다. 1933~1934년이 되어서야 프라이는 인도 조각의 에로티시즘이 조각의 미적 효과를 벗어난 정신증이라고 쓸 수 있었다. 헬렌은 1913년에 사망했고 11년 후 프라이는 정신질환과 다시 만나게 된다. 그가 친구로 삶았던 프랑스 여인이 정신 발작으로 자살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