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미술사 방법론_전기와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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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방법론_전기와 자서전

by 작달비100 2024. 7. 25.

미술사를 연구하는 전기적 방법(biographical method)은 미술작품을 작가의 생애 및 개성과 관련지어 연구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미술가와 그들의 예술이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저자성(authorship)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다룬다. 여기서 작품의 의미, 즉 작품의 착상과 제작은 궁극적으로 작가가 결정하는 것이고 사회경제적 요인들은 이차적인 역할을 한다. 형식적인 양식 요소들도 도상과 별도로 존재할 수 없고 도상은 관례에 따른다 해도 어느 정도 미술가의 개인적 선택을 반영한다. 전기적 방법은 미술가의 생애를 다룬 텍스트를 바탕으로 하며 어떤 미술가가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러한 데이터가 없으면 전통적인 전기적 방법은 적용될 수 없다. 이 장에서는 우선 미술과 미술가들에 대한 전기적 방법은 적용될 수 없다. 

1. 미술가와 신

<우주를 측량하는 신>, <건축가로서의 신>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서양 미술사에서 특정 미술가들의 이름을 적은 최초의 기록들은 신화적인 성격을 띤다. 그 기록들은 미술가를 신과 연결시켰는데 미술가는 살아 있는 듯한 인물을 만들고 신은 생명 그 자체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예술가로서 신의 역할은 13세기 필사본의 한 삽화에 표현되어 있으며 여기서 신은 컴퍼스를 가지고 우주를 측량하고 있다. 이 그림은 미술이란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것이며, 따라서 미술가는 신성하거나 고귀한 혈통이라는 전기적 전통을 반영한다. 미술 후원자들 또한 신의 중재로 영감을 받기도 한다. 일례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라가시의 구데아 왕(King Gudea)은 꿈에 여신 닌후르사그(Ninhursag)로부터 성전을 지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집트에서는 임호테프(Imtotep)가 기념비적 석조 건축을 창시한 사람으로 신뢰받고 있었다. 그의 가장 위대한 현존 작품은 기원전 2700년경에 사카라에 건축한 조세르 왕(King Zoser)의 계식 피라미드이다. 임호테프는 나중에 신으로 받들어져 '태양의 도시'를 의미하는 헬리오폴리스에서 경배를 받게 되었다. 

 

임호테프, 조세르 왕 계단식 피라미드 /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고대 그리스에서는 미메시스와 자연의 일루저(illusion)을 창조하는 능력이 미술가의 전기에서 또 다른 관례가 되었다. 이것은 미술을 대하는 플라톤적 관점이라고 한 바 있지만 또한 옛 신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건축가이며 조각가인 다이달로스는 진짜 살아 있어 걷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인물상들을 만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프로메테우스는 자기가 만든 조각품들에 생명을 주기 위해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왔다. 그들은 정말로 살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리스인들이 불에 있다고 생각한 숨결이나 영혼을 갖지는 못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의 행동이 지나쳤다고 생각한 신들은 그에게 영원한 고통의 형벌을 내렸다. 그는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고 간이 되살아나면 또 쪼아 먹히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신들은 프로메테우스가 미술품의 일루전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예술창작의 한계를 넘었기 때문에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는 생명 자체를 창조하려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신들의 절대권에 도전했다. 

2. 문화적 초상화로서의 전기

플리니우스는 그리스·로마 미술가들의 일화를 기록하면서 이름을 강조한다. 그는 몇몇 여성 작가의 경우처럼 어떤 작가의 작품을 전혀 모를 때조차도 그 미술가의 이름만 알면 그것을 기록한다. 결국 그의 설명은 고대 미술가의 생애와 개성과 작품들을 그린 문화적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플리니우스는 또한 미술가들의 전기라는 장르의 특색을 말해주는 기본적인 관례들을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다. 그가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Zeuxis)에 관해 쓴 논설은 그 같은 관례들을 몇 가지 보여주고 있는데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이 미술가가 재주와 부와 명예에 있어서 선배들을 능가한다는 점이다. 플리니우스는 아폴로도로스가 "제욱시스는 스승들의 예술을 훔쳐 자기 것으로 삼아버렸다."라고 한 경구를 인용한다. 그 이미지는 도둑의 모습으로서 미술가를 사기꾼이나 술수에 능한 자라고 보는 관례를 일깨운다. 제욱시스가 스승들의 예술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점은 전리품을 의미하기도 하므 동시대 미술가들 아니라 수세대에 걸친 미술가들 사이에도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는 관례를 말해준다.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제욱시스는 그림을 잘 그리는 기술 덕분에 재산을 모았고 그 재산을 자신의 명성을 알리는 데 썼다. 그는 올림피아에서 자기 "이름은 본인의 체크무늬 옷에 황금 글자로 수놓도록 했다." 제욱시스는 자기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커서 고객이 값을 지불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자기 그림을 그냥 주기까지 할 정도였다. 한 미술가가 자기 재능을 평가하는 바와 작품의 가치와의 관계는 전기에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테마이다. 제욱시스에 대한 플리니우스의 해석은 서양의 거의 모든 전기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16세기에 라파엘로는 부를 추구한 나머지 아저씨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결혼하기로 동의했다면 아마 금화 3,000스쿠도를 저축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렘브란트는 부를 축적하려고 그림을 판매했다. 렘브란트의 전기를 쓴 아놀드 휴브라켄(Arnold Houbraken)에 의하면 렘브란트는 돈을 너무 좋아해서 제자들이 마룻바닥에 그려놓은 금화를 주우려고 했던 일화도 있다고 한다. 파르미자니노는 부에 대한 열정을 병적이리만큼 극한까지 몰고 갔다. 그는 그림을 포기하고 연금술로 금을 만드는 데 전념했다. 제욱시스는 자기 그림은 값을 매길 수 없다는 이유로 작품을 거저 주어 미술시장의 판을 뒤집었다. 이것은 자신의 천재성을 고집하여 아울러 돈도 잃게 되는 오만한 태도를 나타낸다. 어떤 면에서 그는 자기 꾀에 넘어가 교만의 위험을 피하려다 저선가가 되어버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