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미술사 방법론_마르크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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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방법론_마르크스주의

by 작달비100 2024. 7. 24.

1.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술가들은 미술작품을 주로 사회에 대한 작품의 정치적·경제적 역할과 관련지어 해석한다. 예를 들어 《근대의 화가들 Modern Painters》에서 러스킨이 생생하게 묘사한 터너의 <노예선>은 노예무역 반대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터너의 그림을 해석할 때 노예제도 뒤에 숨은 정치적·경제적 요인과 그것이 화가에게 미친 영향을 간과하지 않는다. 1839년 국회원이자 퀘이커교도로서 노예제도 폐지 운동을 주동했던 토마스 벅스턴(Thomas Folwell Buxton)은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그 처방》을 출판했다. 그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인간을 학대하는 현실을 상세히 기술했다. 이 책을 보험금을 타려고 132명의 노예 갑판에서 바다로 던져버린 영국 선장의 1783년의 보고서를 수록하고 있다. 벅스턴은 이렇게 기록했다. "선장은 선원 몇 사람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병든 노예가 자연사하게 되면 그 손해는 선주들에게 돌아가지만 배의 안전상 필요한 타당한 구실로 노예를 산 채로 바다에 버린다면 보험업자가 배상을 해줄 것이라고 했다. 

윌리엄 터너, <노예선> 사진: 위키미디어

 

마르크스주의에서 영향을 받아온 미술사는 상당 부분 마르크스주의 정치가, 비평가, 철학자들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일직이 1857년~1859년에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정치경제학 비판 입문》에서 예술은 그것을 생산한 문화와 연결시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문화 조건은 똑같이 되풀이될 수 없다는 전제하에 마르크스는 예술생산은 필연적으로 당대의 맥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그리스 미술은 그리스 신화를 전제로 하는 만큼 19세기의 산업화한 사회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벌컨이 로츠 사(Roberts and Co.)에, 주피터가 피뢰침에, 헤르메스가 크레디 모빌리어(Credit Mobilier)에 대항한들 승산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러한 견해는 19세기를 풍미했던 '예술을 위한 예술' 미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반대 입장을 반영한다. 그는 또한 순수하게 형식만 연구해서는 미술작품을 만들 판매하는 데 따른 도덕적·사회적·경제적 요소들을 밝히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에 반대했다. 마르큿는 미술이란 미학자들이 거주하는 상아탑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술품의 생산, 작품과 노동계급(프롤레타리아트)과의 관계, 지배에 의한 미술의 이용에 초점을 맞췄다. 마르크스는 19세기의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의 생산력에 의존하는 경제적 하부구조와 주로 소유 계급으로 구성된 부르주아 상부구조 사이의 사회적 분열을 가속시켰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견해로 볼 때 미술작품은 '노동자들'이 만들지만· 부르주아 계층이 주문하고 소유하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고 하였다. 그 결과 미술가는 다른 노동계급처럼 상품이 되어버린 자기의 작품에서 소외되고 만다. 미술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일부와 멀어졌고 자기가 살던 시대와 지역이라는 전체로부터 격리되었다. 

2. 마르크스주의 역사해석 

<칼 마르크스 >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오스트리아 철학자 에른스트 피셔(Ernst Fischer)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를 대입하여 경제사적 미술사를 신화적으로 구축하고자 했다. 그는 마르크스 사상을 사람들이 도구를 사용하기 이전 시대부터 20세기까지 인간이 발전해 온 역사에 대입했다. 피셔에게 미술이란 처음에는 모방함으로써 나중에는 추상화시킴으로써 자연을 변형하는 작업이었다. 피셔에 의하면 어린아이가 자기 세계를 마음대로 움직이기 위해 단어를 되풀이 말하고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이 사람들은 도구를 반복해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자연을 통제한다. 이것이 집단적인 활동으로 이어지게 되고 사회 조직을 만들게 된다. 그는 "주제-객체의 관계는 노동을 통해서만 생긴다."라고 했다. 그는 노동에 역점을 두고 이것이 문화적·역사적 진보를 추진하는 힘이라고 보았다. 피셔는 "도구를 처음 만든 사람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도록 돌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했으므로 최초의 미술가였다."라고 함으로써 미술의 확실히 노동과 결합할 것임을 주장했다.

 

예술의 근원에 대한 피셔의 마르크스주의 '신화'는 미국 인상주의 화가 휘슬러(James McNeil Whistler)가 설명한 '최초의 미술가'라는 환상과 흥미로운 대조를 보인다. 휘슬러는 19세기 형식주의의 '예술을 윟나 예술' 미학을 옹호했고 1878년에는 이를 지키기 위해 존 러스킨과 소송을 벌였다. 1885년 2월 20일 휘슬러는 런던의 프린스 홀에서 유명한 '10시(Ten O'Clock)' 강연을 했다. 그는 '최초의 미술가'는 "여자들과 움막 옆에 앉아 불에 탄 막대기로 조롱박 위에 이상한 모양을 그린" 사람이며, "불길 속에서 얼굴을 보듯이 자신을 둘렀나 대자연 속에서 흥미로운 형태들을 발견한 사람이다. 따로 떨어져 있는 이 몽상가가 바로 최초의 미술가다."라고 정의했다. 휘슬러는 미술이 실용적·사회적 또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피셔는 휘슬러의 미적 감수성과는 대조적으로 '최초의 미술가'는 도구를 실용적으로 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피셔는 이러한 기반 위에 신화적이면서도 경제학적인 미술사를 구축했다. 일례로 그는 고대 그리스의 미술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두 신이 구현한 계급 차이의 예로서 해석했다. 아폴론은 귀족 계급이나 왕실과 같은 상부구조의 현상 유지를 지지한다. 밑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것은 원초적, 집단적이며 소외에 반대하는 디오니소스적인 반란이다. 이 반란은 문명이 조각조각으로 복잡해 짐으로써 노동이 분열된 가운데 잃어버리게 된 사회적 통일성에 대해 향수를 느껴 일어났던 것이다. 디오니소스로 대변되는 세력들은 "사유재산의 오만한 폭력과 계급통치의 부정"에 대해 일제히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