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무용수들의 화가 '에드가 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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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수들의 화가 '에드가 드가'

by 작달비100 2024. 9. 29.

드가는 인상주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는 사실주의자라고 불리고 싶어 했다. 드가는 '발레의 화가'라는 별명답게 무용수와 발레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19세기의 발레는 당시 문화예술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많은 화가가 발레를 소재로 했다. 드가는 뛰어난 데생 화가였으며 특히 무용수들의 무대나 목욕하는 여성의 누드화처럼 움직임을 능숙하게 묘사다. 이 외에도 경주마와 기수들, 초상화도 그렸으며 그의 초상화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와 외로움을 잘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드가는 1834년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때부터 금융업으로 재산을 모았으며 아버지 역시 유능한 은행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드가는 태어난 때는 프랑스혁명 이후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이 크게 전 유럽으로 번지면서 생활양식은 물론 생각들이 크게 변하는 산업화 시대였다. 미국 뉴올리언 출신의 자유분방한 어머니 때문에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1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며 자랐다. 버지는 드가를 데리고 미술품 수집가들을 만나러 다니거나 루브르박물관을 자주 방문해 어린 나이부터 미술과 가깝게 지내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파의 유명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자기 방을 화실로 만들었을 정도로 그림에 열정적이었다. 파리 대학 법학부에 들어갔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1855년 루이 라모트의 소개로 에콜 데보자르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며 거장들의 그림을 익혔으며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 1867)의 제자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당시 에콜 데보자르는 회화 조각 전공과 건축 전공의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었다. 세계 제일의 정통 미술학교로 많은 화가와 조각가, 건축가를 배출했다. 20세기 초 1차세계대전과 기계문명의 여파로 반역사-반전통의 의식이 강해지면서 바우하우스 등의 교육이 시작되자 보자르의 명성이 퇴색하기 시작했다. 

 

에드가 드가<벨레빌 가족>, 1858 / 사진 위키아트

 

그의 작품 <벨레빌 가족, 1858>은 24세에 이태리 고모네를 방문하여 그린 그림으로 초기 걸작중 하나이다. 고모와 딸 둘, 그리고 사업가인 고모부의 어색한 가족관계를 묘사했다. 상복을 입은 차가운 표정의 고모와 일 때문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는 고모부와의 관계는 그림의 중앙 부분의 공간을 비워두는 구도를 선택해 분위기를 녹여냈다. 

 

드가는 초기에 고전주의 미술에 매료되어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공부했으며 앵그르의 조언을 받아들여 데생 연습을 꾸준히 해 1860년대까지 르네상스 시대와 고전 작품을 700점 이상 복제했다. 그는 1865년에 살롱에 <오르레앙 시의 불행>을 출품했다. 36세에는 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에 참전했는데 사격 연습 중 오른쪽 눈의 시력 저하를 느꼈는데 말년에는 시력을 거의 잃어서 조각에 몰두했다. 에드가 드가는 어린 시절 모친의 외도와 불륜으로 상처가 큰 탓에 여성을 싫어했고 이는 그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게 만든 결정적 원인이 됐다. 그는 매우 개인적이고 은둔적인 신조를 가지고 있어 외롭고 고독한 화가였다. 보자르를 졸업했지만, 파리의 살롱 문화에 별로 흥미를 못 느꼈으며 예술창작 활동을 하는 미술가는 사회와 격리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화실로 지인을 초대하는 일도 없었다. 자신의 세계에 대한 간섭과 침입이라고 생각했다. 

 

1870년대 전반기에는 고전주의 화풍을 과감히 버리고 자신이 선호하는 두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오페라 극장, 특히 발레리나와 롱샴 경마장의 경주가 그것이다. 유화만 아니라 파스텔로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시기이다. 

에드가 드가 at the race, 1877/ 사진 위키아트

1877년, 드가의 작품 <경마장>은 노르만디의 경기장을 표현했다. 40대에 들어서면서 특히 발레리나와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연속동작의 표현에 관심을 뒀다. 왼쪽 아부분을 잔디로 채우며 빈 공간으로 남겨뒀는데 드가가 좋아하는 구도이다. 

 

에드가 드가<무대 위의 무희>, 1878 / 사진 위키아트

그는 자주 파리의 오페라하우스에 방문해 무용수 그림을 그렸다. 데생이나 선을 중요하게 여겼던 탓에 신체의 선을 강조하는 '발레'는 드가의 작품에 매혹적 소재였다. 무용수의 움직이는 동작의 한순간을 고스란히  캔버스에 담으려고 노력한다. <무대 위의 무희, 1878>는 발레리나의 유연하고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이다. 발레의 매력을 물씬 담았는데 화폭에 스며든 무용수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과감한 구도는 당시 귀족들이 주로 앉던 위층 특별석에서 바라본 무대를 표현했다. 

 

부유한 가정환경으로 자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지 않아도 됐지만 40대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이 진 빚으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림을 팔기 시작했다. 경제 사정이 좋아진 50대에는 동시대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한다. 마네, 세잔, 고갱 등의 그림들과 스승인 잉그레의 그림도 오랫동안 수집했다. 1900년대에는 가까이 지내던 유명 화가들이 거의 세상을 떠나며 더 외로운 화가가 된다. 말년에는 시력이 완전히 약해져 거의 보지 못할 정도가 되면서 활동도 미미해진다. 브라크와 피카소 등의 큐비즘 화가가 떠오르며 인상파는 퇴색했고 드가의 생 마지막 5년은 거의 폐인처럼 동네를 거닐었다. 그리고 83세에 생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