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네덜란드가 낳은 최고의 화가 '렘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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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가 낳은 최고의 화가 '렘브란트'

by 작달비100 2024. 9. 30.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를 꼽으라면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의 이름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렘브란트는 프란스 할스나 루벤스보다 한 세대쯤 후의 인물이고 반 다이크나 벨라스케스보다는 일곱 살 아래였다. 그는 미켈란젤로처럼 후세까지 그의 말이 전해질 정도의 천재 화가도 아니었다. 루벤스처럼 능숙하게 글을 쓰는 외교 사절단도 아니었는데 우리는 그 어떤 거장들보다 렘브란트의 이름이 친숙하다. 왜냐하면 젊은 시절 성공적이고 인기를 누렸던 화가에서부터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불굴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에 관한 놀라운 기록을 자서전처럼 자화상으로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렘브란트 반 레인 <자화상>, 1655-8년경/ 사진 위키미디어

 

렘브란트는 1606년 레이덴에서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해서 레이덴 대학에 입학했으나 화가가 되기 위해 학업을 포기했다. 그는 스물다섯이 되던 해에 레이덴을 떠나 상업중심지인 암스테르담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초상화가로 큰 성공을 거두고 부유한 집 딸과 결혼했다. 그는 쉬지 않고 작업했으며 미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했다. 첫째 부인이 사망하며 그에게 상당한 재산을 남겼지만 화가로서의 렘브란트의 인기가 점차 떨어지며 빚더미에 앉았고 14년 후 그의 집과 수집품들은 경매에 부쳐졌다. 두 번째 아내의 도움으로 완전한 몰락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렘브란트를 돕는 아내와 아들은 안타깝게도 세상을 먼저 떠났다. 1655-8년 경 <자화상>에서는 만년의 렘브란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1669년 그의 인생이 막을 내렸을 때 렘브란트에게는 헌 옷 몇 벌과 그림 그리는 화구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결코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는 추한 모습을 결코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아주 성실하게 관찰했고 그 성실성 때문에 살아있는 인간의 실제 얼굴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여기에는 어떤 포즈를 취한 흔적도 없고 허영의 그림자도 없다. 단지 자신의 생김새를 샅샅이 훓고 자신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응시가 있었을 뿐이다. 

 

렘브란트의 많은 자화상에서 보듯 그 예리하고 침착한 눈은 인간의 마음속을 곧바로 꿰뚫어 보는 것 같다. 우리는 인물의 성격과 지위 등을 요약해서 묘사한 방법으로 인해 기억에 남아 있는 역대 거장들의 다른 많은 초상화들을 보았다. 그런 초상화들도 충분히 실감 나고 인상적이지만 복잡한 인간 심리의 일면밖에 나타내지 못한다. 렘브란트의 위대한 초상화들에서는 실제 인물과 직접 대면하여 상대의 체온을 느끼고 공감을 구하는 절박함과 외로움, 고통을 느낄 수 있다.

 

렘브란트 반 레인 <다윗 왕과 압살롬의 화해> 1642년 / 사진 위키미디어

 

그의 그림에는 연극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다. <다윗 왕과 압살롬의 화해>는 성경 이야기를 묘사한 유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다윗 왕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용서 해주는 장면인데, 이전에 다루어진 적이 없는 주제이다. 렘브란트는 번화한 암스테르담의 항구에서 본 동방 사람들을 생각하며 다윗 왕에게 큰 터번을 씌웠으며 터키 사람 같은 옷일 입혔고 압살롬에게는 오리엔트의 환도를 차게 했다. 그는 동방 사람들의 화려한 의상에 매료되었고, 번쩍이는 질감의 효과를 아주 실감 나게 묘사하는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그의 작품들은 어둠침침한 갈색이다. 그러나 어두운 색조는 몇 안 되는 밝고 현란한 색채에 파묻혀 더욱 강하고 힘차게 돋보인다. 그것은 항상 극적인 효과를 고조시킨다. 화려한 의상의 왕자가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용서를 구하는 자세에 비록 압살롬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그의 감정까지 느끼게 한다.  

 

전에 뒤러가 그랬던 것처럼 렘브란트도 화가로서 뿐 아니라 판화가로서도 위대한 거장이었다. 그가 사용한 기술은 목판화나 뷔랭으로 직접 긁어서 파는 동화가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신속하게 작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기법을 에칭(부식 동판화)이라고 부른다. 동판의 표면을 힘들여서 긁는 대신 그 표면을 밀랍으로 덮고 그 위에 바늘로 그림을 그리면 된다. 바늘로 긁은 자리는 밀랍이 제거되어 동판의 표면이 드러나게 된다. 그다음에 동판을 산성 액에 집어넣으면 밀랍이 벗겨진 부분은 산에 부식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온전히 남는데 인쇄 잉크를 칠한 다음 찍어내면 된다. 렘란트의 에칭 작품 중의 하나인 <설교하는 그리스도>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묘사한 것인데 그리스도가 설교하고 있고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주위에 모여있다. 그림에서 유대인들은 옹기종기 서 있거나 앉아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탈리아 미술의 아름다운 인물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렘브란트의 작품을 처음 볼 때 충격을 받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렘브란트가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기 때문에다. 심지어 노골적으로 추한 것까지도 피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많은 사람을 겉보기에는 우연한 듯이 그리면서도 완젹한 조화를 이루는 군상들로 배치하는 기술을 렘브란트는 이탈리아 미술의 전통에서 배웠다. 그는 결코 이탈리아 미술을 경멸하지 않았다. 

 

렘브란트라는 존재는 네덜란드 미술의 모든 분야에서 당시의 어떤 화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거장을 당시 유럽에서 인정받지 못한 외로운 반역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물론 그의 예술이 한층 더 심오하고 타협을 모르는 경지로 들어감에 따라 초상화가로서의 인기가 떨어졌지만 그의 개인적인 비극과 파산의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미술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대단히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