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꿈과 우연의 초현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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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우연의 초현실주의

by 작달비100 2024. 9. 28.

초현실주의는 앙드레 브로통이 쓴 선언문에 힘입어 1924년 파리에서 시작된 미술과 문학운동이다. 이 선언문에서는 인간 정신의 해방을 위한 '순수한 자동기술'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데 자동기술법이란 의식을 정지함으로써 검열을 받지 않은 무의식의 생각이 자유롭게 표출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초현실주의에는 지배적인 표현 양식이 없다. 하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꿈과 우연한 사건들을 강조하여 문인이나 미술가가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이며 이상한 것을 묘사하도록 고무한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1931 / 사진 위키미디어

최초 초현실주의 영화를 제작한 살바도르 달리

살바도르 달리는 1929년에 스페인에서 파리로 건너왔다. 그리고 이 해에 그는 친구인 영화 제작자 루이스 브뉘엘과 함께 최초의 초현실주의 영화인 <안달루시아의 개>를 제작했다. 달리는 자신의 그림들을 가리켜 '꿈을 손으로 그린 사진'이라고 표현했다. <기억의 의 지속>과 같은 환상적이며 환각적인 초기 작품들에서 그는 무의식의 보다 더 깊은 심층을 탐구하기 위해 매끄럽고 완벽한 재현의 손기술을 사용했다. 현란한 자기 홍보가이기도 했던 달리는 결국 자신의 정치적 신념의 보수화 때문에 급진적인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축출당하고 만다. 

 

초현실주의의 도래를 예고한 미술운동의 주동자 막스 에른스트

한스 아르프를 포함한 쾰른 다다 그룹의 주동자가 되었다. 역설과 불합리를 강조했던 다다는 초현실주의의 도래를 예고한 미술운동이었다. 쾰른 다다에서 콜라주와 포토몽타주로 작업했던 에른스트가 1924년 파리에서 초현실주의 그룹에 합류함으로써 그는 다다의 표현 기법들을 초현실주의에 소개한 장본인이 되었다.

 

달리와 함께 초현실주의 그룹의 핵심 구성원인 르네 마그리트

마그리트는 1927년 팔에서 초현실주의자들과 만나기 전인 1925년 파리에서 초현실주의자들과 만나기 전인 1925년에 이미 자신의 모국인 벨기에에서 초현실주의 운동을 진척시켰다. 일찍이 데 키리코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는 신속하게 자신의 고유한 착각적 환영과 문자가 들어간 그림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의 회화의 주된 특징은 이미지들의 기이하고 불안한 병치를 통해 놀랍거나 혼란스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하는 데 있다. 

 

프리다 칼로 자화상 / 사진 위키 미디어

 

멕시코 출신의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들과 같은 부류의 작가라고 주장했던 여성 화가이다. 하지만 칼로는 자신이 사실주의 화가이고 단지 자신의 삶을 묘사하길 원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녀가 말한 이 삶이 실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어렸을 때 소아마비로 고통받았던 칼로는 다시 18살 때 자신이 타고 가던 버스가 전차와 충돌한 사고로 끔찍한 육적 부상을 당한다. 이 사고가 남긴 상처는 이후 그녀의 자전적인 작품들을 결정짓는 요인이 된다. 성인이 된 칼로는 활동적인 공산당원이 됐으며 멕시코의 유명한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1929년에 결혼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리베라와 이혼했다가 1년 만에 재결합하는 파란을 겪는다. 그녀는 주로 멕시코 민속 예술에 기초하여 원시적이고 사실적인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남아 전해지는 총 143점의 작품들 중 55점이 자화상이라는 사실은 그녀가 자신의 내면 감정과 신체적 고통을 그대로, 또 상징적으로 반영한 회화 작업을 했음을 암시한다.

 

그녀의 자화상들은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복합적인 이미지들로 화가의 개인적 경험들, 즉 수많은 유산과 수술의 경험들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 그림들은 이상하게도 절망적 고통의 음산함과는 동떨어진 채 오히려 그것을 직시하고 사색하는 표현들이었다. 자화상은 칼로에게 있어서 자신의 육체적 존재의 외피를 뚫고 들어가 내면의 심리적 깊이를 살피는 기회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화상에 나타난 그녀 자신의 이미지에는 그다지 주목할 만한 것이 없다. 오히려 작품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작가를 둘러싼 온갖 사물들과 상징들이었다. 화려하게 채색된 대다수의 자화상들 안에서 칼로는 멕시코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데 그녀가 입은 농부 풍의 풍성한 치마와 땋은 머리는 자신의 육체적 핸디캡을 숨기는 방편인 동시에 멕시코 전통 유산을 지지하는 정치적 표명으로서 취해진 것이다. 그녀는 47세의 이른 나이에 멕시코시티에서 사망했다. 

 

형이상학 회화 운동을 일으킨 조르조 데 키리코

제1차 세계 대전을 지나면서 이탈리아의 화가들은 내성적인 자기 성찰의 심적 분위기를 들냈다. 그들은 여타 설득력 강한 유럽 미술 운동들의 영향을 멀리한 채, 존재의 신비를 표현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방법을 발견했다. 조르조 데 키리코는 형이상학 회화를 주로 일상의 황량한 길거리 풍경과 고대의 조각상 및 유물을 서로 결합시킴으로써 만들어 냈다. 그의 그림들은 언제나 불안한 꿈속 장면 같은 느낌을 전달했으며, 이는 곧 등장할 초현실주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형이상학 화가들은 르네상스 초기의 작품들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으며 그림 안에서 공간과 빛을 가장 중요한 요소들로 인식했다. 또한 사물의 표면 아래로 뚫고 들어가 존재의 본질로서 지각한 것을 끌어내 보이려고 열망하기도 했다. 

 

형이상학 회화의 주변부에 위치한 작가 조르조 모란디

그는 실제로 한 번도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은 채 그 누구보다도 고립된 삶을 살았다. 볼로냐에서 태어난 그는 미래주의자들과 잠시 교류한 다음, 1918년의 한 전시회 출품작에서는 데 키리코의 초현실적 성향을 뚜렷하게 반영했다. 모란디는 평생 정물화에만 집착했던 화가이다. 그의 정물화들은 그릇, 유리병, 꽃병 같은 작고 사소한 오브제들을 탁자 위에 수평으로 나열하는 지극히 단순한 구도로 그려졌다. 이 같은 방식을 통해 그의 작품은 일상 사물들에 대한 우수와 애조 어린 명상을 위해 바쳐졌다. 모란디는 고요한 일상 가운데서 서정성과 장엄함을 동시에 발견했으며, 이 특성들을 제한된 색채와 사물들 사이의 형태, 공간적 관계 조절을 통해 나타낼 수 있었다. 그의 차분한 고전주의적 성향을 형식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와 샤르댕, 그리고 세잔의 회화 작품들에서 반향되어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