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건축_피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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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_피렌체

by 작달비100 2024. 8. 2.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피렌체 (사진/위키피아)

 

15세기 전체에 걸친 초기 르네상스는 두 시기로 나눠 볼 수 있다. 전반은 발견과 탐사의 시기, 즉 배우고 이해하는 시기이다. 관념과 감각 사이, 두뇌와 심장사이에서 은밀한 투쟁이 벌어지는 힘겹고 진지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진화는 지혜롭고 경험이 풍부한 코시모가 사망할 무렵에 거의 성취된다. 한편 그 후반은 멈출 줄 모르는 매우 젊고 성급한 군주, 로렌초 대공의 통치기에 해당한. 15세기 초부터 건축은 확고하게 우선시된다. 다른 예술들 또한 건축에 따라 발전한다. 물론 대다수 예술가은 조각가인 동시에 화가이자 건축가이기도 했다. 건축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은 건물에 조각을 끼워 넣고 또 거기에 프레스코와 그림들을 채워 넣으려는 야망을 늘 실현하고자 했다. 종종 여러 기법의 달인이기도 했던, 매우 화려한 재능을 갖춘 작가들에게 그 '직종'은 단지 하나의 표현 수단에 불과했다. 즉 관념의 수단이자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이해하고 알고자 하는 데 흠뻑 취한 초기 르네상스 작가들은 뛰어난 기교를 무시한다. 단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무지하다. 그는 진지한 순진함으로 예술을 실천하고 또 신념을 따른다. 그들 중에 허풍을 떨거나 과시하는 자는 없다. 이런 점에서는 중세의 전통이 지속된다. 즉 예술가는 직인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그는 우선 겸손하고 인내심 많은 직인으로서 주로 금은세공 방에서 도제 수련 쌓는다. 공방에서 요구되는 겸손과 인내가 조각가와 화가의 잡업실에서도 견지되었다. 작품은 익명성을 지킨다. 작품은 영적 계획에 따라 제작되고 평가된다. 즉 역량 있는 솜씨나 독창성보다 훨씬 더 영감의 독창성이나 감각의 순수성, 감정의 소통력을 따른다. 제자는 그의 스승을 닮는 것, 스승에게 순종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집단적 열정이 고취되는 이런 곳에서 직업이란 정복을 위한 무기일 뿐이다. 또 그 무기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은 건축이었다. 건축이 공략할 만한 가장 뛰어난 대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산 로렌초 성당 내부_피렌체(사진/ 위키피아)

 

이러한 건축의 우위는 무엇보다 고대 예술의 증언들이 오직 로마의 기념비적 건 유적을 통해서만 이 새로운 신봉자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또 이 죽은 돌들이 갑자기 살아 숨 쉬게 되었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 때마침 1414년에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서 발견된 비트루비우스의 <논문>은 그 비밀을 밝혀 주고 규칙을 일러 주고 또 그 법칙을 규정하고 있었다. 사려깊고 다혈질의 이 젊은이들은 후기 로마의 무모한 건축물을 장에 플라톤이나 베르길리우스의 작품과 동등한 것으로 하나의 예언이자 미술로서 받아들였다. 위대한 두 건축가가 바야흐로 새로운 세기를 열고 있었다. 브루넬레스키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그들이다. 공증인의 아들인 브루넬레스키는 1377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관례에 따라 그는 우선 금은세공을 충실하게 배운 다음 조각가가 된다. 바사리의 말에 따르면 서른 살에 그는 새파란 도나텔로와 함께 로마로 향한다. 그들은 거기에서 유적들을 탐사하고 모사하고 측정하면서 그리고 그 바닥을 파헤치면서 여러 해를 보낸다. 감동으로 충만했던 시절이었다. 이 두 예술가는 거기에서 과거로부터 온 미래의 약속을 되살려낸다. 피렌체로 돌아온 브루넬레스키는 세례당 맞은편에 자리 잡은 대성당, 즉 고딕스타일로 한 세기 전에 착공되고 둥근 지붕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의 완성을 제안한다. 이 반구형의 둥근 지붕으로 브루넬레스키는 로마 판테온의 거대하고 대담한 후손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즉 기존에 축조된 원기둥 초석 위에 직접 둥근 지붕을 얹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상에서 둥근 지붕 끝까지는 백 미터 높이 될 것이다. 또 이는 외국의 지원이나 외적인 지지없이 이뤄질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1418년, 유럽 전역에서 건축가들이 몰려든 기억할 만한 경쟁 끝에 브루넬레스키가 최종 지명되었다. 그의 작업은 1420년에 시작해서 1436년에 완수된다. 결국 그는 로마제국 이후로 아무도 감히 도전하지 못했던 일을 기획하고 성취했다. 영웅적인 둥근 지붕이 거기, 어제의 성당을 수용하고 또 적응하면서 그 웅자를 드러낸 것이다. 모든 위단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브루넬레스키 또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각고의 노력으로 미를 덧붙일 수 있었다.

 

위엄에 넘치는 이 둥근 지붕은 낡은 중세 성당을 지배하면서도 그것을 변질시키거나 그 특징을 저하시키지 않는다. 첨두홍예를 연상시키는 약간 원추형인 윤곽을 통해, 여덟 개의 석재 홍예문을 통해, 그리고 지붕 자체의 색채를 통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이 둥근 지붕은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 로마의 하늘에만 그리고 앵발리드의 둥근 지붕이 파리의 하늘에만 속하듯이 피렌체 하늘에만 속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단연코 브루넬레스키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고딕 최후의 건축가인 동시에 르네상스 최초 건축가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전기의 영향이 지배적인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그 개념의 독창성이 억제되지 않는다. 가령 그 작품들은 그렇게 즉각적으로 정신에 호소하는 편은 아니더라도 정신을 크게 지지하곤 한다. 비례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통해 발상의 단순성과 솔직성을 통해 그의 건물들은 특이하게 그 시대를 훌쩍 앞지른다. 이런 점에서 브루넬레스키는 브라만테와 비뇰라를 예고한다. 마치 마사초와 자코포 델라 퀘르차가 그의 동시대인들인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를 예고하듯이 말이다.